읍성 남문 밖 큰길 동쪽마을 ‘노동(路東)’ 경주의 중심 상가지역 노동은 경주시의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경주시가지 중심 상가지역 중에서도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마을이다. 오래전부터 상가지역으로 번성하다보니 주택이 거의 없고, 주민들의 이주가 잦은 탓에 토박이가 없는 특성을 지닌 도시형 상가마을이다. 경주시청과 극장, 백화점, 병원, 은행, 상점 등 주요상가들이 밀집한 중심부로써 오랫동안 그 영화를 이어왔던 노동은 시청이전과 상가분산으로 인한 도시공동화로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 최근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차 없는 거리, 전통문화예술의 거리 조성, 노동 · 노서리 고분군 정비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금도 내남사거리에서 법원사거리까지 540m 구간의 봉황로를 문화의 거리로 조성하기 위한 전선지중화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동경잡기에 ‘성남방(城南坊)’ 노동은 본래 노서동과 한 마을을 이루며 고려시대 축조한 경주읍성 남문 밖에 위치한 마을로 ‘성남방(城南坊-동경잡기에 기록)’, ‘남문밖’, ‘남바께’, ‘남문외’라고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년 계림부를 경주부로 개칭할 때 경주읍성 남문 밖의 큰길인 종로(지금의 봉황로)를 기준으로 그 동편 마을을 ‘노동(路東)’, 그 서편을 ‘노서(路西)’라고 나누면서부터 ‘노동’이라 불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후 1914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노동리’로 되었다가 1955년 경주시 승격으로 ‘노동동’이 되었다. 노동은 1973년 다시 노서동과 병합하여 중앙동으로 되었다가 1998년 중앙동(노동동, 노서동)과 성내동(동부동, 북부동, 서부동)을 병합하면서 중부동의 일부가 되었다. 노동은 남쪽으로는 내남사거리에서 쪽샘입구 구 시청사거리까지 대릉원 담장을 따라 황남동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은 구 신라백화점 뒤에서 옹기전골목으로 연결되는 옛날 읍성해자를 복개한 길을 따라 법원사거리 남쪽 포항물회식당까지로 동부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은 돼지국밥골목을 경계로 황오동과 서쪽은 봉황로를 경계로 노서동과 이웃하고 있다. 현재 중부동 12통, 13통, 14통을 이루고 있다. 총 345가구 740명으로, 12통은 103가구에 200명, 13통은 112가구 250명, 14통은 130가구 29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경주읍성 남문 밖 마을 ‘남밖’ 남문밖 경주읍성의 남문 밖에 있는 마을로 ‘남밖’, ‘남바께’, ‘남문외’라고도 한다. 남문거리 경주읍성의 남문 터 부근에 있던 마을로 지금의 옹기전거리가 남문거리로 추정된다. 봉황동(鳳凰洞) 봉황대 부근에 있는 마을이다. 서라벌은 ‘봉황비무형(鳳凰飛舞形)’ 노동리고분군(路洞里古墳群) 노동 봉황대 일대에 있는 신라시대 고분군으로, 현재 4기가 남아 있다. 최근 주변의 민가를 모두 철거하고 정비하고 있다. 봉황대(鳳凰臺) 높이 22m, 지름 76m로 신라시대의 단일무덤으로는 가장 큰 규모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왜 봉황대라고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 무덤에 얽힌 봉황에 관한 전설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신라말경에 풍수지리설이 성행했는데 서라벌의 지세가 봉황이 날아가는 듯한 ‘봉황비무형(鳳凰飛舞形)’이라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알(고분)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봉황대라고 한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풍수가 도선에게 신라를 빨리 망하게 할 계책이 없는지를 묻자, 도선은 서라벌의 지형이 ‘순풍에 돛을 달고 나아가는 형세’이니 배를 침몰시키면 신라가 망하게 된다고 일러 주고, 신라에 와서는 ‘봉황비무형이니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게 알을 만들고 봉황이 놀 수 있게 샘을 많이 파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흙으로 봉황의 알을 만들고 샘을 파서 구멍을 뚫으니 배가 침몰하여 신라가 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풍수에 밝은 중국사신이 서라벌의 지세가 ‘순풍에 돛을 달고 나가는 형세’인지라 신라의 번성을 우려하여 ‘봉황이 알을 품는 형세이므로 알을 많이 만들어 두면 더욱 번성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해 이를 믿고 봉황대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금령총(金鈴塚) 노동리고분군에 있는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허리부분에서 금방울이 출토되어 ‘금령총’으로 불린다. 이 무덤에서 금관과 자작나무 관모, 금팔찌, 유리용기, 기마상토우, 토기 등 귀중한 자료가 많이 출토되었다. 금관은 높이 27cm, 지름 15cm로 앞면과 측면에 3개의 나뭇가지 모양의 장식을 세우고 뒤쪽에는 2개의 사슴뿔 모양이 장식을 세웠으며, 양쪽에는 영락을 단 드림장식을 달았다. 금관은 보물 제338호로 지정되었다. 법장사 대웅전은 동헌건물 이전 법장사(法藏寺) 조선 순조 20년(1820)에 봉황대 남동쪽에 세운 조계종 제 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포교당’이라고도 한다. 이 절의 대웅전은 경주읍성의 동헌 건물을 옮겨온 것으로 일제시대에 헐린 동헌건물을 경주의 배 부자가 사서 시주한 것이라고 한다. 경주시청(慶州市廳) 터 경주시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그 터는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계남학교(啓南學校) 터 지금의 제일교회 자리로 1909년 구한말 조선 정부 학부대신(學部大臣)의 허가를 받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설립한 계남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경주 유일의 개화기 신문화를 가르친 교육기관으로, 소설가 김동리(金東里), 시인 박목월(樸木月) 등이 이 학교를 다녔다. 무감당(無感堂)터 경주 고을의 아전들이 계를 모아 지은 정자가 있던 터. 지금의 옛 중앙파출소 북쪽에 있었다는데 헐리고 지금은 없다. 구장 터 지금의 대왕극장 북쪽 일대에 있었던 경주 옛 신시장의 터이다. 새장터 봉황대마을에 새로 생긴 시장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계림가축병원부근에 잠시 장이 들어섰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박무의공수복동도비(朴武毅公收復東都碑)터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빼앗겼던 경주읍성을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운 영해 무안인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을 기리기 위해 조선 철종 12년(1861)에 세운 비가 서 있던 곳으로 지금의 명보극장사거리 서북쪽이다. 현재 이 수복비는 황성공원 남쪽 길 동편 어귀에 있다. 에밀레종 있었던 봉황대 종로(鐘路) 내남에서 경주읍성 남문으로 이어지는 큰 길로 한때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지어 봉덕사종(奉德寺鐘)을 달아 놓고, 아침저녁으로 시각을 알리고, 성문을 여닫을 때나 혹은 군사를 모을 때 종을 쳤는데 이로 인해 ‘종로’라고 했다. 지금의 봉황로이다. 이곳에 있던 종은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新種)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9호로 지정하였다. 내남사거리 내남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는 사거리이다. 시청사거리 경주시청이 위치한 사거리로 지금은 시청이 동천으로 이전하고 ‘구 시청사거리’로 불린다. 아카데미사거리 아카데미극장 북쪽에 있는 사거리이다. 돼지국밥골목 돼지국밥을 파는 식당이 늘어서 있던 곳으로 신백사거리 남쪽골목이다. 신백사거리 옛 신라백화점이 있던 부근이다. 청기와사거리 청기와다방이 있는 사거리로 봉황대 북편이다. 학생당사거리 학생당이 있는 사거리이다. 명보극장사거리 명보극장이 있던 사거리이다. 경주백화점사거리 경주백화점이 있는 사거리로 옛날에는 경주백화점의 전신인 대성상회가 있어 ‘대성상회사거리’라고 했다고 한다. 시청사 터 활용, 노상주차장 폐지 노동은 경주의 중심이며 경주경제의 핵심인 중심상가이다. 이의 활성화를 위해 경주시를 비롯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단위 주거단지 조성으로 인한 상권분산과 대형마트의 입점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중심상가 상인들로 구성된 경주시중심상가연합회를 결성하고 상인 스스로 노력하는 자정노력을 바탕으로 상가 살리기를 전개하고 있다. 좋은 성과를 기대해 본다. 노동은 상가인 만큼 상가 살리기가 주민의 숙원이다. 따라서 주민들은 구 시청사 자리를 잘 활용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이들이 중심상가로 유입되기를 바라고 있다. 또 노동리고분군 일대의 공터에 가설건물을 지어 체험시설을 설치해 관광객을 유치했으면 한다. 또한 신백사거리와 경주백화점 사이의 혼잡을 해소하기위해 노상주차선을 폐지했으면 했다. 이곳에 시범적으로 시행해 보고 반응이 좋으면 노상주차선 폐지를 확대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도심에 공중화장실이 없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명동쫄면 부근에 옛날부터 사용하던 공동화장실이 있긴 하지만 시설이 낡고 좁아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문계환(89) 할아버지로 거동이 다소 불편하다. 노동은 상가지역으로 대를 이어 살아온 토박이가 거의 없고 또 유래를 아는 주민들도 없는 상황이라 취재에 어려움이 많았다. 본 취재에 협조해주신 최정임 중부동장과 중부동 예비군 김두봉 중대장을 비롯한 각 통장과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여러 가지 도움 말씀을 해주신 김태중(76 전 문화원장), 손상익(64 대한인쇄소), 황학천(63 동호 대표)님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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