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전공하지 않았거나 평소 그림에 별 관심없이 지내온 사람이 전시장에 들르게 되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도대체 이 그림은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가 없네요” 무엇을 그렸는지 찾아 보려고 하는데 어떤 사물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니 뭘 그렸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관객이 무엇을 그렸는지에 관심을 두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일테고, 그 물체의 형상이 보이지 않으면 어려운 그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화면속에 어떤 사물이 그려졌는지를 알려고 하지 말고 이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또는 무엇이 느껴지는가에 관심을 두고 마음의 눈을 열어 그림을 대하게 되면 무엇인가를 반드시 느끼게 마련이다.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는 그림, 흔히 말하는 사실화(또는 구상화)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닮게 그려서 그 물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아름답게 모방해 내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얻는 표현 방법의 그림이다. 그러니까 장미꽃을 곱게 그렸다면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장미로 볼것이고 푸른 바다 풍경을 그리면 누구나 시원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추상’(또는 비구상)이라는 것은 사물 형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실에 존재하는 자연의 사물을 생략 또는 과장, 변용하여 가장 본질적인 감정만을 담아내는 표현 방법이다. 예를 들면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간단한 선이나 색깔로만 표현하여 꽃이라는 설명을 떠나 아름다움의 요소만 찾아 낸다든가 시원한 바다풍경을 아무 다른 물체의 표현없이 푸른 물감만 칠한다든가 하여 바다를 보는 본래의 감정만을 강요하는 것이다.
여기 우리나라의 현대 추상화가 유영국의 작품이 있다. 우리는 이 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 쉽게 알아내기 힘들다. 화면은 붉은 색조를 바탕으로 약간의 청회색과 황색 그리고 강한 청색이 변화를 주고 있다. 얼핏보아 어떤 풍경같기도 한데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기는 좀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알 필요는 없다. 그저 색면의 구성이 강렬한 아름다움을 주고 있어 쾌감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그림을 보는데 이것으로 족하다. 더 이상 여기서 무엇을 그렸는지 사물의 형상을 찾아낸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대상으로 한 것은 자연이었고, 그것을 탐구해온 형태는 비구상(非具象)을 바탕으로한 추상이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연이 아니고 선이나 면, 색채,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이 구성된 자연이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