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가 많아 ‘솔밭’ → ‘송전(松田)’ 김해김씨 300호 영남제일의 집성촌 송전은 양북면 지역으로 동대산의 형재봉이 동해로 흘러내리다가 대종천에 이르러 옷깃을 여미듯 산자락을 병풍처럼 둘러 아늑하고 넓은 분지를 이룬 곳에 자리한 마을이다. 손명주로 유명한 두산리의 안쪽(서쪽)에 위치한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빙 둘러싸인 분지에 있어 ‘둘산’이라고 불리는 두산리와 본래 한 마을을 이루었으며, 이 일대에 소나무가 많아 ‘솔밭’, ‘송전(松田)’이라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둘산과 분구되어 송전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둘산, 송전이 본래 한 마을로 ‘둘산’이라고 했는데, 김해김씨가 300호 정도로 영남에서 제일 큰 집성촌이었다.”고 한다. 경주에서 양북면 어일리를 거쳐 감은사와 문무대왕수중릉으로 가는 길을 따라 대본 방향으로 가다가 들판 가운데에서 두산, 죽전, 송전을 가르키는 이정표에서 우회전하여 대종천을 건너 산모롱이를 돌아 들어가면 두산리가 있고, 이어서 그 안쪽에 있는 마을이 송전이다. 경주시청에서 32km, 45분 거리이다. 두릅, 취나물, 원추리 등 산나물재배 송전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그 외에 한우와 산나물을 재배하고 있다. 한우는 310두 가량 기르고, 산나물은 두릅, 취나물, 원추리 등을 재배하고 있다. 김해김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약 80호가 살고 있다. 기북골·사창이 송전1리, 송전·고천이 송전2리를 이루고 있다. 송전1리는 40가구에 8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송전2리는 130가구에서 250여명이 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기북골에 사는 올해 102살의 오기화(월산댁) 할머니이다. 오 할머니는 100살을 넘긴 할머니답지 않게 눈과 귀가 총명하고 건강했다. 무슨 음식이든 가리지 않고, 술과 담배도 많이 했다고 한다. 최근에 다리가 불편해 출입이 어렵고, 가끔 정신을 놓기도 한다고 했다. 활과 화살 보관한 무기창고 기북골 마을 앞의 산 모양이 마치 베틀과도 같아 ‘기북골’, ‘기부곡(機富谷)’이라고 한다. 혹은 ‘공동(孔洞)‘이라고도 부른다. 기북골은 안쪽 골짜기에 10가구 정도가 있는 마을을 ‘안기북골’이라 하고, 위쪽에 있어 ‘상공(上孔)’이라고도 한다. ‘밖기북골’은 기북골 바깥쪽에 있는 마을로 ‘하공(下孔)’이라고도 한다. (30가구) 동제 기북골은 해마다 가을에 동제를 지낸다. 당나무 안기북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있었는데 죽고 60여년전에 다시 심었다. 사창(射倉) 옛날 이곳에 활터가 있었고 화살과 활을 보관하던 무기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사창’이라 불렀다고 한다. 두산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다. (10가구) 마을 풍년과 안녕위한 합동야제 송전(松田) 소나무숲이 울창하다고 하여 ‘솔밭’ 혹은 ‘송전’이라 불렀다고 한다. 송전의 원래 마을이라하여 ‘원송전(元松田)’이라고도 한다. (100여가구)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모내기하고 난 후 처서무렵에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야제(野祭)를 지낸다. 송정1리와 송전2리 그리고 이웃한 두산리 등 3개 마을이 모여 들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고천(古川) 죽전으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 마을로 옛날부터 마을 가운데로 맑은 내가 흘렀다고 하여 ‘고내’, ‘고래’라고 불렀다. 고래는 다시 ‘안고래’와 ‘바깥고래’로 나뉘는데 안고래는 안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람이 살았으나 지금은 살지 않고, 바깥고래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울산박씨 집성촌으로 현재도 울산박씨 10가구정도가 산다. (23가구) 당나무 마을어귀 오룡산 남쪽기슭 개울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수령이 120년 정도 되었다.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임진왜란 때 4부자 출전 두산서당(斗山書堂)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키고 세 아들과 함께 각종 전투에서 활약했던 김해인 문옹(汶翁) 김석견(金石堅)을 향사하는 곳이다. 조선 정조 22년(1798)에 지었으나 고종 4년(1867) 금령에 의해 헐리고, 1981년 송전리 165번지에 다시 세웠다. 공은 임진왜란 때 강무회(講武會)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몽수(夢秀), 몽양(夢良), 몽남(夢男) 등 세 아들과 함께 출전해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둘째아들 몽양은 전사하고 공은 부상했으며 훈련원정(訓練阮正)에 제수되었다. 난이 평정되고 부자가 모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순조 16년(1816)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송전 뒷산기슭 언덕배기에 자리한 이 서당은 사당과 전사청 등 부속건물과 함께 한 폭의 그림처럼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조형미와 멋진 기품을 드러내고 있었다. 송계정(松溪亭)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김해인 둔재(遁齋) 김몽양(金夢良)을 추모하여 1960년대에 후손들이 세웠다. 공은 선친 문옹공과 함께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순절했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송전리 113-1번지에 있다. 농수정 울산인 농수 박경일(朴敬一)을 추모하여 1967년에 후손들이 고천에 세운 정자이다. 두 봉우리 형제처럼 나란히 형제산(兄弟山) 양북면 송전리와 입천리, 죽전리에 걸쳐 있는 높이 520m의 산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어 ‘형제봉’이라고 한다. 산성(山城) 고래마을 뒷산으로 성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산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형제봉산 앞(동쪽)에 있다. 오룡산(五龍山) 송전마을 뒷산으로 산세가 다섯 마리 용의 형국이라고 한다. 북두리 송전 남쪽에 있는 산으로 이 마을의 안산이다. 남등 고천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고래마을 남쪽에 있다고 ‘남등’이라고 불렀다. 봉황이 알 품은 형국 가는골 큰골 옆에 있는 좁은 골짜기이다. 구골 송전 남쪽에 있는 북두리산의 아홉 골짜기로 ‘신시남밭골’, ‘토까골’, ‘딱밭골’, ‘내피골’, ‘조밭골’, ‘대밭골’, ‘수리지골’, ‘피밭골’, ‘구골’ 등이다. 구들빼골 구들돌이 많이 나는 골짜기로 송전 남쪽 선바우 동쪽에 있다. 다락골 고천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당숫골 기북골의 양북초등학교 송전분교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당수나무가 있었다. 뒷골 기북골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못골 고천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박진골 고천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봉황골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형국의 골짜기로 송전마을 서남쪽 대수못 아래쪽에 있다. 암숫골 기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응골 고천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큰골 송전 남쪽에 있는 가장 큰 골짜기이다. 선바위 그늘 똑바로 서면 점심 때 선바우 마을 남쪽, 즉 북두리산 북쪽기슭에 우뚝 서있는 바위이다. 시계가 귀했던 시절 바위그늘이 똑바로 서면 점심때가 되어 해시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쇠미깃재 안기북 박진골 북쪽에서 입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쇠목잇재’라도 한다. 기항(基項) 터가 잘록하게 목처럼 생겨 ‘터목이’라고도 한다. 송전 남쪽 산기슭에 있다. 보골들 송전마을 앞에 있는 들로 ‘상보’, ‘중보’, ‘하보’ 등의 보가 있어 ‘보골들’이라고 했다. 대수지를 막고 난 후 지금은 보가 없다. 고래들 고래 앞에 있는 들이다. 린골들 고래들 남쪽에 있는 들로 현재는 가꾸지 않은 묵은 땅이다. 등구배미 송전마을 위에 있는 들이다. 마을에서 제일 농사가 잘 되는 상답이라고 한다. 입실로 넘어가는 지방도 확·포장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산간마을로 산세 좋고, 물 좋고, 공기 맑은 천혜의 자연환경이면서도 넓은 들을 보유하고 있고, 대종천과 어일-대본 간 도로에 인접해 있어 교통도 편리해 살기 좋은 마을이다. 그러나 마을주민들은 오지마을이라며 생활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감포에서 어일을 거쳐서 입실로 넘어가는 지방도를 확·포장했으면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상택(82 전 양북초등학교 교장), 김상하(54 삼성재단 전무), 김상덕(51 육군대령), 김병권(48 전 경찰대학 교수), 김병찬(45 서울시경찰청)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 주신 황태선(송전2리) 이장님과 김정영 전 노인회장님께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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