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 양남면 기구리(基邱里) 두들에 터 잡고 살아 텃두들→기구(基邱) 100년전의 종 매달린 ‘종대나무’ 연한 푸르름이 묻어나는 새 싹에서부터 제법 짙푸른 녹색을 띤 다 자란 잎새까지 5월의 산색은 갖가지 푸른색의 향연으로 참 곱다. 양남면 기구리를 가기위해 입실에서 동대봉산을 넘어 가는 고갯길 정상에서 발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산색에 잠시 넋을 놓았다. 기구는 양남면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을로 동대산 삼태봉 동쪽기슭 깊은 골짜기의 산골마을이다. 효동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는 하서천 언저리를 중심으로 산언덕배기에 의지해 마을이 형성되어 두들(둔덕)에 터를 잡고 살았다는 뜻으로 ‘텃두들’이라고 부르다가 한자표기로 ‘기구(基邱)’라 불렀다. 기구는 40여가구의 작은 마을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을 숲과 회관이 있는 아래쪽의 ‘아랫마을’과 그 위쪽에 있는 ‘웃마을’, 남쪽 점골의 ‘점마을’, 북쪽 거랑너머 ‘갈골’ 등 4개의 자연부락으로 나뉜다. 본래 웃마을이 마을의 중심으로 ‘큰마을’이라고 하고, 아랫마을을 거랑가에 생긴 마을이라 ‘갱빈마을’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의 형세를 본 어느 풍수가 말하기를 아랫마을은 베가 모이는 자리이고, 중마을은 북실, 웃마을은 도토마리에 해당하는 베틀형국으로 마을이름을 베틀기(機)자를 써야하는데 터기(基)자를 써서 인물이 안 난다고 했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 울창한 숲 기구의 동쪽은 환서리, 서쪽은 신대리, 남쪽은 상계리와 신서리, 북쪽은 석촌리와 석읍리에 둘러싸여 있다. 경주에서 입실을 거쳐 양남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를 따라 동대산 넘어 하서천을 따라 난 지방도 904호선을 타고 효동리, 석읍리, 석촌리를 지나면 가파른 길이 거의 끝날 무렵, 마을 어귀에 울창한 숲이 좋은 마을이 기구이다. 경주시청에서 34km, 45분 거리이다. 이 마을은 한 때 139가구까지 살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45가구로 줄었고, 주민도 80여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다. 산골이지만 대체로 넓은 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그 외에 축산과 고추농사를 짓고 있다. 한우의 경우 17가구에서 200두, 젖소 30두를 기르고, 고추는 20여가구에서 1만여평을 경작한다. 밀성박씨 집성촌으로 40가구가 박씨이고, 나머지 성씨도 모두 외손들로 마을 전체가 한 가족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정석(94, 전방댁)할머니로 양남까지 걸어 다니고 혼자 생활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다. 큰마을에 사는 김 할머니는 기자가 집으로 방문했을 때는 이미 어디로 멀리 외출했는지 문고리를 나일론 줄로 묶어 둔 빈 집이었다. 임란창의 박인국 장군 후손마을 기구(基邱) 특이한 두들(둔덕)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텃두들’, ‘기구’라 불렀다. 밀성박씨 집성촌으로 임진왜란 때 창의한 좌승지 정엄공 박인국(朴仁國) 장군의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 온 정엄공이 조선 선조 때 의병을 일으켜 크게 용맹을 떨치다 연전(지금의 울산)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아들 영남(永楠)이 장군의 유해를 수습해 고향인 진주 남사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 묘를 쓴 후로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웃마을 본래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텃두들’의 중심마을이다. ‘큰마을’이라고 불러오다가 그 아래 거랑가에 ‘갱빈마을’이 들어서고 ‘아랫마을’이라고 불리면서 이 마을이 더 커지자 큰마을의 의미가 퇴색되어 상대적으로 ‘웃마을’이라고 했다. (18가구) 아랫마을 큰마을 아랫쪽 거랑 옆에 있어 ‘갱빈마을’, ‘아랫마을’이라고 부른다. (23가구) 점마을 기구 남쪽 골짜기로 옹기점이 있는 마을이라 ‘점골’, ‘점마을’이라고 불렀다. 1957년까지 옹기를 구웠다는 이 마을은 옹기공장에 노동자들이 많을 때는 27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2가구가 있다. (2가구) 갈골 기구 북쪽에 있는 마을로 자갈밭에 마을이 들어서 ‘갈골’이라고 했다. (4가구) 폭우에 7명 희생으로 마을 이주 부뭇골 불뭇간(대장간)이 있던 마을로 ‘야곡(冶谷)’, ‘야곡리’라고도 하며 기구 서북쪽에 있다. 최근까지 한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또 범굴이 있었다고 하여 ‘범우골’이 변하여 된 것으로도 보고 있다. 매무골 기구 서북쪽 매봉재 밑에 있던 마을로 ‘매곡(梅谷)’이라고도 불렀다. 또 뒷동산이 매의 형국이라고 한다. 주씨들의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은 13가구가 살았으나 1973년 폭우로 인해 7가구가 떠내려가고 7명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본 후 석촌리로 이주 하였다.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정월보름에 5군데의 자연부락에서 동제를 지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지내지 않는다. 동제를 지내지 않는데에는 다음의 사연이 전해온다. 이 마을에 정씨가 한집 살았는데 동제를 모시고 3일 뒤에 죽었다. 그 후로 아무도 동제를 지내지 않으려고 해서 새마을사업 때 아예 없앴다. 당목 본래 마을마다 당목이 있었으나 지금은 웃마을에 수령 약 200년된 마치나무(마채나무)가 있고, 갈골에 수백년 된 소나무가 당나무로 섬겨지고 있다. 갈골의 경우 이 마을에 처음 한집이 살 때 개를 길렀는데 범이 와서 물고 가 7마리나 잃어버렸다. 이때 누가 정성을 들이면 좋다고 해서 마을 보호림 숲에서 한 나무를 정해 정성을 드렸더니 더 이상 범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200년전 서당 터에 새로 재실지어 만송재(晩松齋) [재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운 밀성인(密城人) 증 좌승지(贈 左承旨) 정엄공 박인국(朴仁國) 장군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웃마을에 세운 재사다. 본래 이곳에는 200여년전에 세운 서당이 있었는데 약 40년전에 ‘만송재’라는 현판을 걸고 재실로 사용해 오다가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그 자리에 2002년에 새로 지었다. 매봉재 [산] 양남면 기구리와 석촌리에 걸쳐 있는 마치 매처럼 생긴 산으로 ‘응봉(鷹峰)’이라고도 한다. 큰 마을 뒷산으로 가장 높은 산이다. 돌산태말랭이 [산] 매봉재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돌이 많다고 한다. 동산 [산] 기구 북쪽에 있는 산으로 본래 국유지인데 마을에서 관리하다보니 ‘동산’이라고 했다. 두리봉 [산]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산으로 기구 남쪽에 있다. 진등산 [산] 진등(긴등성이)이 있는 산으로 기구 서남쪽에 있다. 지남산 [산] 지남철이 난다고 해서 ‘지남산’이라고 불렀다. 마을앞산으로 ‘안산’이라고도 한다. 태끼봉 [산] 봉우리의 모양이 토끼처럼 생긴 산으로 기구 동남쪽에 있다. 뻑대산 [산] 양남면 기구리와 환서리에 걸쳐 있는 높이 319m의 산으로 측량 푯대가 있다고 한다. 마을 서편에 있다. 공동산 [산] 공동묘지가 있는 산으로 마을 동쪽 쇠디말랭이 옆에 있다. 쇠디말랭이 [산] 구리가 많이 났다고 하는 산으로 마을 동쪽에 있다. 이 산은 황소 한 마리만한 금이 묻혀있다고 해서 일제 때 금광을 개발했으나 금이 나지 않았고, 나중에 조선사람이 다시 뚫어 구리가 많이 났다고 한다. 황소만한 금이 묻혀 동매모팅이 동산 밑에 있는 모롱이로 지금은 도로가 나 있다. 정지랍 모팅이 웃마을 정자나무가 있던 앞에 있는 모롱이다. 본래 이곳에 종대나무가 있었는데 100년전에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아랫마을의 마을 숲에 달아 놓았다. 진등 진등산에 있는 긴 등성이다. 칡밭등 칡이 많았던 등성이로 기구 서남쪽에 있다. 산 형국이 칡덩굴이 뻗어나가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름 붙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질등 모화, 울산으로 넘어가는 큰길이 있었다는 등성이로 한길(큰길) 옆에 있는 등성이라 ‘한질등’이라고 했다. 용바웃골 남쪽이 된다. 늘밧장재 성낫골 북쪽에 있는 고개로 등성이가 아주 넓다고 한다. 고사집골 고사집(상여집)이 있었던 골짜기로 마을 동쪽, 큰사낫골 북쪽에 있다. 논골 기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논이 많다고 한다. 농바웃골 농바우가 있는 골짜기로 점텟골 북쪽에 있다. 다앗골 기구 남쪽에 있는 고개로 골짜기가 많아서 ‘다아골’이라고 했다. 당숫골 동제를 지내던 당수나무가 있던 골짜기로 대밭밑 서쪽, 즉 마을 서남쪽에 있다. 등잔골 돌산태말랭이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등잔처럼 생겼다. 미영밭골 등잔골 아래에 있는 미영밭(목화밭)이 있던 골짜기로 용숫골 서북쪽에 있다. 사낫골 기구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산혈골’, ‘산어리골’이라고도 한다. 성낫골 쇠딩이 밑에 골짜기로 돌이 많은 산이다. 용숫골 동쪽에 있다. 시붓골 시북(수렁)이 있는 골짜기로 마을 서쪽, 농바웃골 북쪽에 있다. 새작골 기구와 환서의 경계구역으로 새가 자고 난 골짜기라 붙인 이름이다. 안논골 논골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용바웃골 기구 서남쪽에 있는 마을에서 제일 큰 골짜기이다. 용머리처럼 생긴 용바위(석촌)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이다. 용숫골 용이 등천했다는 골짜기로 기구 북쪽에 있다. 작은 사낫골 사낫골의 작은 골짜기이다. 점텟골 옹기점이 있었던 골짜기로, 용바웃골 서쪽에 있다. 큰사낫골 사낫골의 큰 골짜기이다. 새 한 마리 앉을 만큼 남아 농바우 모양이 마치 농처럼 생긴 바위로 농바웃골에 있다. 대밭밑 대밭이 있었다고 하는 들로 기구 서쪽에 있다. 진등들 진등 아래에 있는 들이다. 홍덕들 마을에서 가장 넓은 들이라서 마을에 큰 덕을 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기구 동쪽에 있다. 용소(龍沼) 용이 등천을 했다고 하는 웅덩이로 용암골에 있다. ‘용시’라고도 한다. 20m가 넘는 높이의 폭포와 깊은 웅덩이가 있어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1976년경에 원전에서 부지매립용으로 깨어버려 없어졌다. 마을 서북쪽에 있다. 기구마을숲 물이 흘러나가는 모습을 가리려고 오래전에 인공으로 조성한 숲으로 참나무, 포구나무, 느티나무, 마채나무, 소나무 등 수백년 된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본래 고목 13그루가 있었는데 1980년대에 나무를 더 심어 숲을 가꾸어 놓았다. 새안바우 마치 새가 앉은 것 같다고 하여 ‘새안바우’라고 하는데, 기구 동남쪽 냇가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해일이 왔을 때 이 일대가 모두 잠기고 이 바위 꼭대기에 새 한 마리가 앉을 만큼 남아 있었으므로, ‘새안바우’, ‘시앙바우’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구와 환서의 경계지점 가까이 기구2교 거랑 옆에 있다. 다앗골들 다앗골에 있는 들이다. 종대나무 마을회관 앞 기구마을 숲에 있는 소나무로 100여년전부터 종이 달려 있다고 한다. 1947년경 좌우익으로 갈려 갈등이 심할 때 한 주민이 총소리를 듣고 종을 치다가 괴뢰군의 총을 맞아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마을에서는 이 종을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종은 마을의 위급을 알리려고 나무에 달아 놓고 치는데 본래 큰마을 모팅이 정자나무 앞 종대나무에 달아두었던 것을 100여년전 그 나무가 불타 없어지고 이곳에 다시 달았다고 한다. 깊은 골짜기 모여 홍수 잦아 양남의 가운데 토막에 해당하는 기구는 깊은 골짜기에 위치해 산세 좋고, 공기 맑고, 깨끗한 물 풍부해 살기 좋은 마을이다. 또한 산골치고는 들이 많아 부자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지하수를 식수로 이용하는데 최근 갑자기 수질이 나빠져서 새로 관정을 뚫으려 하고 있다. 또 이 마을은 산간마을로 깊은 골짜기들이 모이는 지역이라 비가 많이 오면 주변의 많은 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이곳에서 합수되어 홍수로 인한 수해를 많이 당했다. 그래서 마을의 제방을 총 450m가량 막아야하는데 월성원전과 마우나오션에서 받은 지원금으로 현재 50m가량 설치했다. 앞으로 300m의 제방만 설치하면 안심하고 살 수 있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박재영(75 전 경주시의원), 오석술(71 양남새마을금고 이사장), 박상수(66 대구 (주)대양 대표), 박용화(65 대구 삼풍기업 대표), 박완영(62 예비역 육군소령), 박유수(62 가정연합 경주시지부장), 박도문(61 울산 대원개발 대표), 박익근(52 서울산업대 교수)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오석술 양남새마을금고 이사장과 박의근 이장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