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걸음 백두대간 상의 유일한 학교 폐교 대간길은 밭과 논둑길을 지나고… 작점고개-용문산-국수봉-큰재-백학산-지기재-신의터재 8월 16~17일은 월성중학교 답사연구회 소속 선생님과 학생 등 45명이 전남 강진, 해남, 영암, 화순지방의 문학 및 문화유적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그 후유증으로 심신이 피로한 상태에서 18일 출발해 작점고개에 도착하니 19일 0시 18분이다. 이번 구간은 산이 낮고 야산이 많아 능선의 힘도 약하며, 농로와 소로길로 인해 등산하기에 불편하고 별 특징이 없는 구간이라 백두대간 줄기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0시 32분 들머리를 출발하여 능선으로 올라서자 쉬어가기 좋은 넓은 공터엔 종주자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고 있다. 혹시나 잠을 깨울까봐 조심조심 지나간다. 길은 대체로 잘 나 있는 편이며, 바위 옆 움막이 있는 곳을 지나 가파른 봉우리를 하나 지나면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고, 조금 더 오르면 710m의 용문산 정상으로 1시 59분이다. 헬기장과 삼각점이 있는 정상에서 쳐다보는 밤하늘은 무수한 별들이 초롱초롱 빛을 발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기도원인 용문산 기도원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목탁소리와 기도소리, 고함소리가 뒤섞여 깊이 잠든 산속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기도원 안부 삼거리를 지나, 완만한 오르막에는 조그만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국수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심하다. 2시 58분 국수봉 정상에 올라서니 표지석에는 국수봉이 763m임을 알려주고, 민주지산 삼도봉에서 경상북도와 충청북도 경계를 이루던 마루금은 이곳 국수봉부터 속리산 형제봉까지는 상주시를 통과한다. 4시에 묘지 있는 곳을 지나면서부터는 가시나무와 잡목으로 인해 10여분간 진행하는데 힘이 들었으며 조금 더 내려오면 민가가 나오고 큰재에 도착한다. ‘재가 크다’ 하여 큰재라 하는 이곳은 왕복 2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우측에는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가 있는데 대간상의 유일한 학교로 1949년 11월 9일 개교하여 5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7년 3월 1일 폐교되었다고 한다. 그 터에 지금은 부산 녹색연합의 생태학교가 들어서 있다. 들머리를 찾는데 어두운데다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한참을 헤매다 겨우 길을 찾아 올라가려고 하는데 대간꾼을 실은 관광버스 한대가 큰재에 도착한다. 5시 20분 시멘트 도로를 지나 목장 방향으로 가는 길에 대간 종주자 한분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이영도 목장에서는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며,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기 위해 구애를 청하는 암소의 애끓는 울부짖음이 계속 이어진다. 회룡재는 풍수학상으로 오른쪽 산줄기를 청룡, 가운데 산이 뻗어 온 것을 내룡, 산이 돌아들면 회룡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 같으며, 길의 방향이 자주 바뀌지만 길은 뚜렷하고 6시 30분 개터재에 닿는다. 전망 좋은 봉우리를 지나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 봉우리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면 가파른 내리막길은 완만해지며 7시 45분 윗왕실마을 임도가 나온다. 물을 구하기 위해 효곡리 마을로 내려가니, 많은 사람들이 한 집안에 모여 있는데 곧 초상이 날 것 같은 분위기다.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열녀와 효자가 나와 효자각이 세어지면서 효골이라 불렀다 한다. 왕실(旺室)은 양편이 산으로 둘러싸여 그 모양이 ‘마치 임금님이 계시는 왕궁과 같이 생겼다’하여 왕실이라 불렀으나 관청에서 왕(王)자를 못쓰게 하여 왕(旺)으로 고쳐 부른다고 한다. 식수를 보충하고 식사를 한 후, 자그마한 봉우리를 몇 개 넘어 완만하게 오르니 615m의 백학산 정상으로 9시 30분이다. 정상에서 10여분 내려서자 넓은 임도가 나오고, 왼쪽으로 물이 흐르는 도랑에는 소시적 영천 은해사에 소풍을 가 계곡에서 잡았던 어린 가재 친구들이 꼬물꼬물 움직이면서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담배밭과 포도밭을 지나 11시 10분 ‘개의 머리 형태를 닮았다’는 개머리재 고갯마루에 서니 민가 한 채가 보이고, 농로와 사과밭을 지나면 옛날 동네 뒷산에 도둑이 많이 나왔다는 왕복 2차선 도로의 지기재가 나온다. 소나무 숲을 가파르게 오르내리다 보면 왼쪽에 민가 한 채가 보이고 논둑길과 송전탑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서면 13시 27분 신의터재에 도착한다. 해발 280m를 알리는 표지석과 의사절곡 김선생 준신 유적비와 낙동강, 금강 분수령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며, 이것으로 또 한 구간 종주를 무사히 마치니 종주가 끝나는 날까지 북으로 북으로 쉼 없는 전진만이 있을 따름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