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통은 안강읍 지역으로 신라 제42대 흥덕왕릉이 있는 마을로 잘 알려져 있다. 경주의 북단에 위치한 이 마을은 북쪽은 포항시 기계면과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강동면 양동마을과 맞닿아 있으며, 남쪽은 안강리, 양월리, 서쪽은 산대리에 접해있다. 안강에서 기계로 가는 68번 지방도를 타고 기계방면으로 가다가 양월을 지나면 서쪽으로 어래산 기슭에 펼쳐진 마을이 육통이다. 경주시청에서 21km, 28분 거리에 있다. 원당(元堂), 능곡(陵谷), 거리동, 못밑, 존당(存堂), 황새마을 등 인근 여섯마을의 중심에 위치하여 ‘육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와 단감, 포도 등 과수와 한우, 젖소를 기르는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 마을은 안강의 넓은 들을 끼고 있어 예로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이 마을에는 고(물고)만 외워도 날이 샌다고 할 정도로 고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들이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물고)만 외워도 날 샌다 육통, 원당, 새각단이 육통1리, 능곡, 존당, 못밑, 양장이 육통2리, 황새마을, 남산, 소평이 육통3리를 이루고 있다. 육통1리는 150가구(실제 130가구)에 300여명의 주민이 벼농사, 단감, 한우, 젖소를 기르며 살고 있다. 단감은 60가구 4만여평, 포도는 30가구 1만8천여평을 경작하고, 한우 200두, 젖소 700두를 기르고 있다. 육통2리는 150가구에 400여명의 주민이 벼농사와 축산, 단감농사에 종사하고 있다. 축산의 경우 젖소가 15농가 2000두, 한우 35농가 500두, 단감은 10여 농가에서 2만여평을 경작하고 있다. 육통3리는 83가구(실제 65세대정도)에 180여명의 주민이 벼농사, 단감, 포도, 한우농사를 짓고 있다. 단감은 5가구가 1만5천여평, 포도 20가구 1만4천평, 한우 400두, 젖소 100두가량을 기른다. 육통리의 최고령자는 육통에 사는 전숙이(93 칠국댁) 할머니다. 자그마한 체구의 전 할머니는 마을회관은 물론 밭일도 거들정도로 아주 건강하시다. 뭐든지 다 잘 먹는다는 할머니는 평소에 적게 먹고, 술과 담배는 안한다고 했다. 여섯마을로 통하는 중심 육통(六通) 이 일대에 있는 원당(元堂), 능곡(陵谷), 거리동, 못밑, 존당(存堂), 황새마을 등 여섯마을의 중심에 있어 ‘육통’이라고 불렀다. 현재 육통리의 자연부락 중에 가장 큰 마을로 ‘큰마을’, ‘큰각단’이라고도 한다. 성산이씨 30여 가구와 경주김씨 2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110가구) 원당(元堂) 고려시대 이 마을에 원절이라는 큰 절이 있어 ‘원당’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육통의 제일 위쪽 마을이라 하여, 으뜸 원(元)자를 따서 ‘원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일성김씨 집성촌으로 현재 15가구가 살고 있다. 큰마을 서북쪽에 있다. (25가구) 새각단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이라 하며, 큰각단의 동쪽에 있다. (30가구) 육통못안 육통못의 안쪽에 있는 마을로 지금도 2가구가 살고 있다. 존당(存堂) 고려시대 존제(尊制) 선생이 마을을 일구어 정착했다고 해서 ‘존당(尊堂)’이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서당이 있던 마을이라 하여 ‘존당(存堂)’, ‘존대이’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원당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50가구) 능골(陵谷) 흥덕왕릉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능골’이라고 한다. (37가구) 못밑 흥덕왕릉을 축조할 때 지관이 능 앞에 못을 파면 좋다고 하여 못을 팠는데, 그 못 아래 위치한 마을이라 ‘못밑’ 혹은 ‘제하(堤下)’라고 한다. (30가구) 황새 알까고 살아 황새마을 이 마을에는 큰 참나무 두 그루가 있었는데 이곳에 황새가 알을 까고 살았으므로 ‘황새마을’ 혹은 ‘학지(鶴旨)’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평해황씨들이 많이 살았다고 황새마을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금은 평해황씨가 3가구 산다. 학지동이라고도 하며 원당 서쪽에 있다. (60가구) 양장 양잠을 많이 했던 마을이라 ‘양잠’이라고 하던 게 ‘양장’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주축부락’이라고도 한다. (28가구) 남산 노당리와 경계에 있는 마을로 본래 노당 구역이었는데 하천 남쪽은 육통이고, 그 북쪽은 노당이다. (5가구) 소평 넓은 평야의 중앙에 있는 작은 구릉에 자리한 마을이라 ‘소평’이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상습침수지역으로 1991년 태풍(글래디스)에 마을이 침수된 후로 양월2리 창마을로 집단 이주했다. 수령 600여년 천연기념물 회화나무 동제 이 마을은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에 동제를 지낸다. 큰마을 가운데 있는 마을 당나무에서 육통의 모든 마을이 같이 지낸다. 당목(천연기념물 제318호 회화나무) 높이 17m, 몸통 둘레 6m에 이르는 크고 늠름한 자태를 자랑하는 이 나무는 수령이 450년 된 회화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육통리 1427번지에 있는 이 나무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공민왕 때 이 마을 김영동이란 젊은이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부모님께 말하기를 자신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이 회화나무를 잘 가꾸어 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왜적을 무찌르다 전사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최소한 수령이 650년 이상이 된다. 장화부인과 깊은 사랑 흥덕왕릉(興德王陵) 신라 제42대 흥덕왕과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을 합장한 능으로 ‘장릉(獐陵)’이라고도 한다. 육통 능골 북쪽 산기슭에 있다. 흥덕왕은 왕비인 장화부인과 사랑이 깊었던 왕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위에 즉위한 다음해에 왕비가 죽자 신하들이 새로운 왕비를 맞을 것을 권했지만 하물며 앵무새도 짝을 잃고 슬피우는데 사람이 어찌 그리할 수 있느냐며 뿌리쳤다. 10년 뒤에 죽으면서도 장화부인과 합장해 줄 것을 유언하여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 합장했다. 그래서 이 능의 상석을 만지면 부부간의 금슬이 좋아진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상석의 뒷면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아 움푹 파여져 있었으나 지금은 새로운 상석을 설치해 놓았다. 흥덕왕릉은 규모도 크고 호석과 12지신상, 돌난간, 문무인상, 돌사자 등 왕릉양식의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흥덕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다량 발견되어 피장자의 신분이 확인된 몇 안되는 무덤 가운데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왕릉주변의 굽은 소나무 숲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경관 또한 일품이다.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휘호 학도의용군전적비 안강기계지구에서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학도병을 기리는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2000년 11월 6.25 50주년을 맞아 이한동 국무총리의 휘호를 받아 육통마을 뒷편에 전적비를 세웠다. 두리봉 흥덕왕릉 뒷산 정상부의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긴 산으로 매방골 위에 있다. 매봉 노당과 육통 사이에 있는 산 봉우리이다. 소두방재 어래산 정상부로 솥뚜껑처럼 생겼다. 새질미기 새로 길이 났다고 하여 ‘새질미기’라 하며, 큰골 서북쪽에 있는 고개다. 육통에서 어래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진재 큰골과 샛골 사이에 있는 긴 고개다. 대밭등 신이대 밭이 있는 등성이로 바르미기의 남쪽, 흥덕왕릉 뒷산이다. 속등 큰골의 안쪽에 있는 등성이 진재등과 새질미기 사이에 있다. 진잿등 진재 위에 있는 등성이다. 질등 큰골 서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그 위에 길이 나 있어 ‘질등’이라고 한다. 흰바웃등 흰바우가 있는 등성이로 행상바우와 평풍바우 사이에 있다. 소두방재 아래가 된다. 흥모재(興慕齋) 흥덕왕릉 수호를 위하여 경주김씨 안강종친회가 중심이 되어 1991년에 건립한 재실이다. 4칸 목조건물로 가운데 2칸은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흥덕왕릉 입구에 있다. 돌부처 있었던 ‘부채다물’ 매방골 벙드미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바르미기 매방골의 서쪽에 있는 곧은 골짜기로 소두방재 서편 아래가 된다. 샛골 원당의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다. 큰골 큰말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대곡(大谷)’이라고도 한다. 기준네밋벌 기준네 선산으로 묘가 3상구 있다. 새각단 앞의 버덩이다. 양지바탕 큰골의 북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버덩이다. 부채다물 신라때의 돌부처가 있었다고 하여 ‘부채(부처)다물’이라 부르는 마을로 큰말의 동북쪽에 있다. 지금은 논이 되었다. 엉구다물 암거(暗渠)와 다물(돌담불)이 있었던 마을로, 큰말 동쪽에 있다. 혹은 엉구나무가 있었다 하여 ‘엉구다물’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예전에 몇집이 살았으나 지금은 논이 되었다. 깼다가 다시 붙여놓은 ‘농바우’ 농바우 농처럼 생긴 바위로 큰골에 있다. 못을 막을 때 깼다가 다시 원상복구 시켰다고 한다. 지금도 정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찾는 영험있는 바위라고 한다. 마당바우 마당처럼 평평하게 생긴 바위로 진잿등 밑에 있다. 맷돌바우 모양이 맷돌처럼 생긴 바위로 속등에 있다. 무당바우 큰골안 새질미기 6부능선에 있는 바위이다. 선바우 양지바탕 위에 우뚝 서 있는 바위이다. 평풍바우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큰 바위로 벙드미 위에 있다. 행상바우 모양이 행상(상여)처럼 생긴 바위로 양지바탕에 있다. 흰바우 흰바웃등에 있는 하얀빛깔의 바위이다. 너븐딩이 형제고의 남쪽에 있는 들로 황새마을 동남쪽에 있다. 돌바대 지형이 동그랗게 생긴 들로 존당 동쪽에 있다. 새들 엉구다물 동쪽에 있는 들로 큰말 동쪽에 있다. 소평(小坪) 소야원(所也院)이란 원이 있었던 자리에 있는 들로 황새마을 동남쪽이다. 골안못 양장(주축부락)의 동북쪽 골짜기 안에 있는 못이다. 실못 ‘시리못’이라고도 부르는 존당 남서쪽에 있는 못이다. 지금은 경지정리하고 없어졌다. 육통못 큰말 북쪽에 있는 못으로 ‘육통제(六通堤)’라고도 한다. 큰골못 큰골에 있는 못으로 ‘대곡지’라고도 한다. 밀가루로 막은 ‘밀가리못’ 밀가리못 미국 원조로 밀가루를 품으로 주고 막은 못이다. 1960년대에 막았다. ‘원당못’이라고도 한다. 비빗내걸 양장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황새마을 앞으로 흘러 형산강으로 들어가는 도랑이다. ‘비천(飛川)’이라고도 한다. 너븐딩이보 너븐딩이에 있는 보다. 섬보 유느고의 남쪽에 있는 보다. 홈달이 홈통을 놓아 들에 물을 댄 보로 형제고 옆에 있다. 감맛고 황새마을 동쪽 들에 있다. 버들고 육통의 동쪽에 있다. 모래고 소평의 북쪽에 있다. 석달고 모래고 남쪽에 있다. 유느고 지영고의 남쪽에 있다. 잡살고 학지의 동쪽에 있는 고로 부근에 잡살(자갈)이 많았다고 한다. 지영고 너븐딩이고 남쪽에 있다. 추북고 석달고의 남쪽에 있다. 형제고 갈밋고의 서쪽에 있는 두 개의 고로 형제처럼 나란히 있다. 호박고 육통의 북쪽에 있다. 옥산-육통간 도로 완공했으면 옥산-육통 마을간 도로가 공사구간의 일부 땅주인이 동의하지 않아 일부구간의 도로에 대한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 우회하고 있는데 2년전에 땅주인이 협조해서 동의서를 받았는데 아직까지 공사가 재개되지 않고 있다. 그 구간 550m에 대한 공사가 빨리 이루어지길 바란다. 주민들이 매우 불편하고 사고 위험이 높다고 한다. 또 육통에서 원당으로 들어가는 마을 진입로가 좁고 교행이 안되는데 이를 확포장 했으면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황수관(62 연세대 교수), 김영춘(56 행정자치과장), 최우식(53 대구지법 판사), 이종걸(53 경상북도 사무관), 정용찬(44 포항 변호사), 김경수(40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등이 있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