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북면 호암리(虎岩里)
범처럼 생긴 바위 있어 ‘범바우[虎岩]’
함월산 기슭의 신라고찰 기림사
꽃샘추위와 폭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은 이미 함월산 깊은 골짜기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호암리 갔던 날, 함월산 응달진 곳엔 아직 잔설 가득하건만 기림사 뒤뜰 연못엔 개구리 떼를 지어 노닐고, 산속 작은 개울가 버들강아지 혹한의 겨울을 떨치듯 두 팔 활짝 열어젖힌 채 봄단장을 서두르고 있었다. 호암은 함월산 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신라고찰 기림사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앞산에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범바우’, ‘호암(虎岩)’이라고 했다.
호암은 기림사 어귀에 있는 마을로 남쪽은 안동리, 동쪽은 용동리, 북쪽은 포항시 오천면, 서쪽은 보덕동의 황룡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주시청에서 30km, 36분 거리이다.
호암리는 ‘범바우’와 ‘큰말’, ‘동구’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진 산골마을이다. 총 53가구에 16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기림사 입구의 식당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정구지와 한우를 부업으로 하고 있다. 한우는 10가구에서 60마리, 정구지는 1가구가 4천여평을 경작하고 있다.
이 마을은 장수마을이다. 하남호(95 재호어른) 할아버지와 김금숙(95 금산댁) 할머니 외에도 90살을 넘은 사람이 3명이라고 한다. 함월산을 끼고 있어 산 좋고, 물과 공기가 맑은 덕분이 아닌가 싶다.
깨끗한 물 맑은 공기의 장수마을
범바우[호암(虎岩)] 마을 어귀의 앞산에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범바우’ 혹은 ‘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9가구)
동제 해마다 음력 칠월칠석날 동제를 지내는데, 약식으로 마을대표들이 술을 붓고 제를 올린다고 한다.
당나무 마을 앞 들판에 있는 시무나무(사시나무)로 수령이 천년에 가깝다고 한다. 지금은 속이 비어있고, 껍질만 살아있다.
큰말 마을 중심으로 호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큰마을’, ‘대동(大洞)’이라고도 했다. 예전에는 70가구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24가구에 그친다. (24가구)
동제 이 마을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어 해마다 봄에 동제를 지냈으나, 30년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그 이후로 칠월칠석날 약식으로 마을대표들이 술을 붓고 제를 올린다.
당목 오래된 느티나무로 수령이 360년 가량된다고 한다. 경주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동구 기림사의 입구에 마을이 있으므로 ‘동구(洞口)’, ‘동개’, ‘사동(寺洞)’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3가구)
도통골 기림사 뒤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많을 때는 17가구 살았다고 한다. 부처님이 도를 통한 자리라고 하는 이 마을은 1991년 글래디스 태풍으로 길이 유실되어 마을이 철거되고 없다.
인도승 광유가 지은 임정사(林井寺)
기림사(祇林寺) 언제 지어진 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인도승려 광유가 임정사로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원효대사가 중건한 신라고찰이다. 조선 철종 14년(1863)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중건했다. 호암 북쪽 함월산에 있다. 호암리 419번지.
기림사 건칠보살좌상(祇林寺乾漆菩薩坐像) 조선 연산군 14년(1501)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보살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건칠불(乾漆佛)이다. 보물 제415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기림사 대적광전(祇林寺 大寂光殿)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지은 이 건물은 여섯번 고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 중수할 때의 양식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833호이다.
기림사 목탑터(祇林寺 木塔址) 기림사 약사전(藥師殿) 앞에 있는 목탑의 터다. 한 변이 9.5m 돌축대 위에 높이 70cm의 주춧돌이 남아 있고, 중심에는 방형(方形)의 2중 사리공이 장치되어 있다.
기림사 삼층석탑 기림사 명부전(冥府殿) 앞에 있는 3층 석탑(石塔)으로 유형문화재 제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지붕돌에 이끼가 많이 끼었다.
기림사 소조 비로자나삼존불(祇林寺 塑造毘盧遮那三尊佛) 기림사 대적광전의 3존불로 15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보물 제95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신비의 물 다섯가지
기림사 오종수(五種水) 기림사 창건주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사라수(娑羅水) 왕국에 차(茶)를 가져 갈 궁녀 8명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물을 떠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다섯 개의 우물이다.
①안명수(眼明水) 기림사 입구 천왕문 앞에 있는 우물로 이 물을 마시면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②장군수(將軍水) 나한전 앞 3층 석탑 아래 묻혀 있다는 물로 이 물을 마시면 천하무적의 장수가 된다고 한다. 혹시 반역자가 생길까봐 이 위에 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탑 밑에 귀를 기울이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③화정수(華井水) 경내 화정당 뒷마당에 있는 물로 놀란데 먹으면 특효라고 한다.
④감로수(甘露水) 북암자에 있는 우물로 물빛이 우유빛이지만 일단 바가지로 뜨면 무색(無色)이 되는 최고의 음료수라고 한다.
⑤오탁수(烏啄水) 기림사 동편 산마루에 있는 우물로 까마귀가 바위를 쪼아 만들었다고 한다.
기림사 응진전(祇林寺 應眞殿) 기림사 대적광전 앞에 오백나한상을 모신 전각이다. 유형문화재 제21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호암리 열녀각(虎岩里 烈女閣) 열부 경주이씨(李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고종 26년(1889)에 세웠다. 이씨는 하학로(河學魯)의 처로, 남편이 난치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단지수혈 하였고, 다리 살을 베어 남편을 살렸다고 한다. 큰말 당수나무 남쪽에 있다.
해강정(海岡亭) 조선말에 비서승(秘書丞)을 지낸 최세림(崔世林)을 추모하여, 아들 참봉(參奉) 헌수(憲壽)가 1925년에 세운 정자이다. 큰말 당수나무 동쪽 언덕빼기에 있다.
매월당 영각(梅月堂 影閣) 이 영당은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1435-1493)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본래의 영당은 현종 11년(1670) 경주부사 민주면이 경주남산 용장사에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그후 고종 15년(1878)에 이를 애석하게 여긴 경주유림이 경주부윤 민창식에게 청원하여 함월산 기림사 경내에 다시 지었으나 그 후 퇴락하여 1998년 경주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매년 음력 2월 중정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남적암 기림사 남쪽에 있는 암자로 ‘남암’이라고도 한다.
달을 머금은 형국의 ‘함월산’
함월산(含月山) 양북면의 호암리와 안동리에 걸쳐 있는 높이 562m의 산, ‘남악(南嶽)’이라고도 한다. 달을 머금은 형국이라 ‘함월’이라고 했다고 한다.
용치산 옹칫골 뒤에 있는 용머리처럼 생긴 산이다.
관음바우산 관음바우가 있는 높이 468m의 산으로 곧은골 서쪽 도통골에 있다. 관음보살이 이곳에 앉아 도통한 자리라고도 한다.
큰팔밭미기 큰 팔밭(화전)이 있던 산으로 큰말 서북쪽에 있다.
염불암(念佛岩)삐알 염불암이 있었다는 기림사 뒷산이다.
자래모가지 모양이 마치 자라의 목처럼 생긴 산으로, 기림사 동쪽 개울가로 산등성이가 내려온 곳이다.
장구미기 지형이 마치 장구처럼 생긴 산으로, 도통골 서쪽에 있다.
칠성되배기 곧을골 북쪽에 있는 7개의 산봉우리로 ‘칠성봉’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는 산봉우리를 ‘되배기’라고도 한다.
갈밭미기 도통골 서북쪽 함월산 정상부에 수 만평의 평지가 있는데 갈밭이었다. 이곳의 서쪽은 황룡골, 동쪽은 오어사, 남쪽은 기림사가 된다.
신라 때 왕들이 다니던 길
불령재 돌부처가 있었다고 하는 고개로 이곳을 넘으면 황룡이다.
이 길은 신라 때 왕의 어가가 다녔던 길로 알려지고 있다. 경주에서 황룡골짜기를 거쳐 동해로 가기위해서는 서낭재와 말구리재를 넘고, 모래재를 넘어, 불령재를 넘으면 도통골을 통해 기림사에 이르고 여기서 감은사를 거쳐 동해로 갔던 것으로 보인다.
모래재 모래땅이라 모래가 많다고 한다. 말구부리재와 불령재 사이에 있다.
말구부리재 옛날에 경주로 넘어가는 길이었는데 말이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길이 험하고 벼랑이다. 모래재와 서낭재 사이에 있다.
서낭재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던 고개로 말구부리재와 황룡 사이에 있다. 서낭재를 넘으면 황룡이다.
서낭재 기림사에서 오천 진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도독골재 도통골에서 포항시 남구 오천읍 진전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도독골이라고 한다. 옛날에 도둑이 살았다고 한다.
살구나무재 기림사 북동쪽에 있는 고개로 오천으로 넘어가는 길이 나 있는 고개다.
개캣디 개캣디(개콧등)처럼 생긴 등성이라 하여 ‘개콧딩’이라고도 부르며, 도통골 북쪽에 있다.
곧은골 동개 북쪽, 즉 기림사 오른쪽에 있는 곧은 골짜기이다.
대밭골 기림사 북쪽 폭포 위에 있는 골짜기이다.
도통골 기림사 북쪽에 있는 골짜기.
뒷골 호암 뒤에 있는 골짜기. 큰팔밭미기 서쪽이다.
멋방골 동개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 산에 나는 것은 나라의 것’
불당골 불당이 있었던 골짜기로 큰말 동쪽에 있다.
용치산 밭골 밭이 있었던 골짜기로, 용치산에 있다.
용칫골 용추(龍湫)가 있었던 골짜기로, 기림사 서북쪽에 있다.
지통골 지통(紙筒)을 놓아 종이를 떴던 골짜기로, 진짓골 북쪽, 큰말 서쪽이다.
진짓골 호암 서쪽에 있는 진 골짜기이다.
불령봉표석(佛嶺封表石) ‘이 산에서 나는 것은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출입하거나 벌목하지 못하게’ 하는 표석으로 불령고개에 있었다고 한다.
관음바우 관음보살이 수도한 곳이라고 전하는 바위로, 관음바우산에 있다.
범바우 모양이 마치 입을 벌린 범처럼 생긴 바위로, 호암리 어귀에 있다. ‘호암(虎岩)’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바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진 바위로, 범바우 밑 냇가에 있다. 집체만한 이 바위엔 땅장군이 디뎠다는 발자국 3개가 있다고 한다.
옥대 비늘장식 용으로 승천
기림사 폭포 높이 약 10m 되는 폭포로 ‘숫용치’라고도 한다. 기림사 북쪽 골짜기에 있다. 이 폭포 아래에는 폭 10m에 이르는 웅덩이가 있고, 병풍처럼 오막하게 바위로 둘러싸여 안온한 느낌이 든다.
곧은골 폭포 곧은골에 있는 폭포로 ‘암용치’라고도 한다.
용치 용추(龍湫) 용칫골에 있는 물웅덩이.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를 받고 환궁하다가 이 부근에 이르렀을 때, 태자 이홍(理洪: 효소왕)이 달려와 옥대를 보고 “옥대에 장식되어 있는 용이 모두 살아 있습니다”고 하며 옥대의 비늘 장식 하나를 떼어 이 소 가운데로 던졌더니, 비늘이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새들 새로 형성된 들로, 범바우 앞에 있다.
열마지깃 들 열 마지기 논배미가 있는 들로, 범바우 마을 뒤에 있다.
오리봇 들 오리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로 큰말 동남쪽에 있다.
큰들 큰말 동쪽에 있는 들로 현재 마을회관 되에 당나무가 있는 들이다.
큰말들 큰말 앞에 있는 들로 열녀각 앞에 있다.
평밭들 큰말 북쪽에 있는 들로 평평하다고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오리보 오리봇들에 있는 보다.
폐수처리시설 설치했으면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이 마을은 장수마을이면서 기림사라는 큰절이 있어 그 영향으로 마을 주민들이 순박하다고 한다. 옛날부터 이 마을에는 화투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옛날엔 오지마을이었지만 최근 도로사정이 좋아지면서 포항으로 출퇴근이 용이해 시골답지 않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다.
연중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마을이라 환경오염 요인도 많지만 늘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친환경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연중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기림사에서 폐수처리시설을 하지 않은 채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하면서 옳게 정화되지 않은 물이 도랑으로 흘러들어 도랑물의 오염이 심하다고 한다. 따라서 주민들은 폐수처리시설을 설치하여 이를 정화하고 쾌적한 생활환경을 가꾸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양상원(71 전 오릉초등학교 교장), 하덕문(68 전 경주정보고등학교 교감), 김재식(61 전 경주역장), 하정호(58 한국유리 중국지점장), 하만수(57 예비역 육군소령), 박임용(56 국정원 사무관), 박세원(50 예비역 육군소령), 하찬욱(35 미국LA 변호사) 등이 있다.
취재에 협조해주신 서근주 이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