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방문기(8)●
송악산은 그대로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에서, 한때의 중흥과 부귀영화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유적지의 옛 흔적만 후세들에게 쓸쓸히 전해 주고 있는 만월대를 만났다.
회경전을 중심으로 길이 450미터, 너비 150미터의 궁터 전체를 만월대라 하며 신라의 옛 궁터 반월성과 좀 비슷하지만 일대가 평지로 되어있는 언덕이다. 해방 후에 한차례 왕궁이 발굴 되었지만 1361년 당시 본체였던 회경전과 승평문, 동락정 그리고 왕이 거처하던 진덕전이 모두 불탄 후라 폐허의 궁터로 남아있을 뿐이다.
만월대는 고려조 500년간의 왕궁지로 개성 중심부에 있는 남대문에서 약 2키로 떨어진 지점에 있다.
진산인 송악산을 배경으로 하여 동쪽과 서쪽을 흘러 내리는 작은 개울을 끼고 자리한 만월대는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고지대에 있어 진봉산과 개성시 전역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궁궐과 전각들은 고려말기 공민왕때 홍건적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렸고 그 대위에 남아있는 거대한 초석군으로 그 우람한 옛 모습을 미루어 짐작하기에도 넓은 자리이다.
개성시 중앙에 있는 남대문은 서울의 남대문(숭례문)보다 2년 앞선 조선 태조때 건립되었으며 모양과 크기는 서울 남대문과 비슷하나 남문루라 하여 원대에 종각이 있는 종루가 하나 더 있으며 600여년전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복사 대범종이 걸려있다고 한다.
또 개성시의 동쪽 자남산 기슭에는 유명한 선죽교가 있고 선죽교에서 좀 떨어진 곳에 숭양서원이 있다.
선죽교는 포은이 이방원(나중에 태종)의 수하에 의해 피살된 돌다리로 정몽주의 핏자국이라고 전해지는 붉은 얼룩이 지나온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방문객의 발걸음을 당기고 있다.
숭양서원은 포은 정몽주와 관련된 고적지이다. 1573년 선조6년에 정몽주의 신위를 모시기위해 그의 옛집 자리에 세운 서원이며 포은 선생의 영정과 소장품, 옷과 필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
남대문에서 중앙서원을 지나면 경덕궁이 있는데 태조의 잠저(임금으로서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사저)이자 정종이 한 때 궁궐로 삼았던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그 터전만 남아 있다.
그밖에 개성문표대성전은 성균관이란 이름으로 역사박물관 노릇을 하며 현존하고 있다.
이 건물은 고려 문종이 세운 대명궁의 별궁이었는데 나중에 숭문관이 되었고 1089년 국자감을 이곳으로 옮긴 적도 있다고 한다. 모두가 임진왜란시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나중에 대성전과 서제를 짓고 대규모의 부속건물과 명륜당 건물을 지었다. 개성 성균관은 서울 성균관과 같은 태학이 아니고 지방 향교와 같은 곳이다. 유적지만 외롭게 현존할 뿐 주변의 건물은 없이 황량하고 적막하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