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숲 짙은
고개
‘푸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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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靑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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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靑令)’
설날 합동세배35년 전통 민족의 대 명절 설날이다.
요즘은 서력기원으로 된 달력에 익숙해서 그렇지 우리민족의 사실상 한해의 시작은 설날이다. 음력에 의한 무자년 새해는 이제 시작인 셈이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새해가 밝아오는 설날 아침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마을 어른들을 찾아 세배를 드리는 아름다운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개인화, 핵가족화 되면서 이러한 풍속이 퇴색되고 겨우 가족단위로 세배의 명맥이 이어지는 수준이다.
그러나 안강읍 청령리에는 모든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어른들에게 합동세배를 올리는 아름다운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해마다 설날이면(정월 초이틀) 마을회관에서 마을어른들을 모시고 마을 주민들이 다 같이 세배를 올리는 행사를 35년 전부터 해 오고 있다고 한다.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청령은 현곡면 나원리와 안강읍 사방리 사이에 자리한 마을로 형산강을 동쪽에 끼고, 천북면 모아리와 마주보고 있고, 남쪽은 나원리, 북쪽은 사방리, 서쪽은 검단리에 둘러싸인 마을이다. 경주에서 금장을 통해 현곡-안강을 잇는 지방도 68번을 타고 나원을 지나면 동해남부선 철길 주변으로 다소 산만하게 보이는 마을이 청령이다. 이 마을의 본동에 해당하는 청령 큰 마을은 골짜기에 들어서 있어 지나치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도 청령이라고 하면 잘 모르고 안강 가다가 감 많은 마을이라고 하면 다 알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며 감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감나무가 곳곳에 서 있다.
감나무 많은 마을
청령은 본래 이 마을에서 나원 1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나무가 짙고 울창하여 ‘푸른재’ 혹은 ‘청령(靑嶺)’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강서면 검단리를 병합하여 ‘청령(靑令)’으로 바뀌었으며 천북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안강읍에 편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청령은 총 147가구에 4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고, 한우 300두 정도를 기르고 있다. 이 마을은 곡부공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30여 가구가 공씨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이차난(96·덕국댁) 할머니로 마을회관에 놀러 나오실 정도로 건강하다.
곡부공씨 집성촌
큰마을 아랫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청령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아랫마을의 위에 있으므로 ‘윗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아랫마을 인구가 더 많다. (50호)
아랫마을 청령의 입구의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회관이 이곳에 있다. (60호)
원골 아랫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사생재가 이곳에 있다. (18호)
새각단 청령 남쪽의 현곡면 나원리 계탑과 청령 사이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계탑에 인접해 있어 ‘계탑’, ‘청령계탑(靑令溪塔)’이라고도 한다. (15가구)
대청골 진당걸 맞은편에 있는 마을로 산 아래 대나무가 많아 ‘대청골’이라고 한다. (5가구)
산막골 예전에는 5가구가 살던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 민가는 없고 비장사가 들어서 있다.
동제 이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 이레날 자정에 동제를 지낸다. 제관은 이장, 새마을지도자, 마을재무 3인이 되고, 하루 전에 재계(齋戒)한다고 한다.
당나무 이 마을 당나무는 진당걸에 있는 약 50~60년 된 느티나무이다. 본래는 이 위 등성이에 오래된 큰 소나무 2그루가 당수나무로 있었는데 오래되어 6~7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지금의 느티나무는 그전에 미리 예비로 심어 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공자 영정 모사
사상재(泗上齋) 이 마을에 사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의 재실로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에 모셔진 공자 영정이 1915년 이 마을에 살던 공형표(孔灐杓) 등이 중국 곡부로 가서 공자의 진영(眞影)을 모사해 온 것이라고 하니 그 즈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문에 따르면 공씨 후손들이 오랫동안 청령리 사수(泗水 : 본래 공자가 태어난 곡부의 사수를 비유한 말로 형산강을 이른다)가에 살았다고 한다. 공(孔)씨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600여년전 원나라 노국대장공주가 고려 공민왕에게 시집올 때였다. 당시 중국의 공자 54세 적손 가운데 공사소(孔泗紹)가 공주를 모시고 고려로 건너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회원군(檜原君)으로 봉해졌다.
이 마을 공씨들은 그 후손으로 약 400여년전에 이 마을에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문은 최현필(崔鉉弼 ; 1860~1936)이 썼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으로 동쪽에 1칸에 방, 가운데 2칸에 마루, 서쪽 2칸에 방을 배치했으며 서쪽에 고자실을 갖추고 있다.
문선왕 영전(文宣王影殿) 청령리 577번지 사상재(泗上齋) 뒷등성이에 있는 공자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이곳에 모셔진 영정은 1915년 이 마을에 살던 공형표 등이 족보를 만들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중국 곡부 공자묘(孔子廟)에 가서 공자 진영 2본을 모사해 1본은 중국 안동현의 공교회(孔敎會)에 보내고 나머지 1본은 이곳에 모셔와 재실과 영전을 짓고 봉안했다. 그러나 지금의 영정은 원본의 훼손이 심해 1978년 다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월암정(月巖亭) 창원인(昌原人) 이암(二巖) 황익준(黃益俊)을 추모해 그 후손들이 조선 영조 40년(1764)에 곧은골에 세운 직산재(直山齋)라는 재실이었다. 지금의 건물은 산막수준으로 남아 있던 허름한 재실을 1987년에 새로 지었다. 그리고 5년 전에 ‘월암정’으로 고쳤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전체를 방을 배치해 묘제 때 사용한다고 한다.
최해필(崔海弼) 송덕비 최해필은 내남 출신으로 일제 때 6천석을 한 부자였는데 소작인들이 60~70년 전 원골에 재실과 송덕비를 세웠다고 한다.
재실은 오래되어 헐리고 비석만 남아있던 것을 40년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지금 이 비석 주변에는 신이대가 우거져 밭을 이루고 있어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찾을 수가 없는 지경이다.
마을에 전 재산 희사 ‘지 처사’
지처사 묘 사상재 서쪽 골짜기에 있는 지씨 성을 가진 처사의 묘다. 지 처사는 이 마을 절에 살았는데 죽을 때 자신의 전 재산을 마을에 희사했다. 그 은덕을 기려 해마다 음력 7월 15일이 되면 성묘하고 마을회관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송곳바우 마치 송곳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는 바위로 산막골 어귀에 있다. 약 15년 전 이곳에 비장사가 들어서 절 마당에 바위가 서 있다. 옛날에 장군이 가지고 놀다가 떨어뜨린 것이라고 전한다. ‘배까리바위’라고도 한다.
황새봉산 마을 뒤에 있는 산으로 황새형국이라는 이야기와 옛날 해일 때 황새 한 마리 앉을 만큼만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딴독만 청령마을 어귀 도로 건너편 할매밥집 부근의 작은 돌산이다. 큰 바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동산으로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산은 양동마을에서 바라보면 참 아름답고 안산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본래 이 마을 소유였으나 지금은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고 한다.
푸른재 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로, 푸른 고개라 청령(靑嶺)이라고도 한다. 마을이름이 여기서 유래했다.
재만딩이 마을 서남쪽의 푸른재 위쪽에 있는 산으로 현곡면에 걸쳐 있다. ‘재’는 고개이고, ‘만딩이’는 꼭대기를 이른다.
3정승 살았던 골짜기
곧은골 계탑의 서남쪽에 있는 곧은 골짜기이다.
삼정골 옛날에 3정승이 살았다는 골짜기이다. 혹은 정자 3개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시무통골 시묘를 살았던 골짜기라고 한다. 시묘에서 유래되었다.
산막골 옛날에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마을에서 가장 마지막 골짜기로 입구만 터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재피골 재피나무가 많다고 ‘재피골’이라고 한다. 지금도 재피나무가 많다. ‘조피골’이라고도 한다.
원골 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원집이 있었다고 전한다.
청평들 이 마을 동쪽에 있는 들로 조금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청두들’이라고도 부른다.
상구들 사방보다 위에 있다고 해서 ‘상구들’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새들 지금으로부터 약 60~70년전에 새로 만든 들이라 ‘새들’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심은 팽나무
폭우나무 신라 때 심었다고 전해오는 오랜 팽나무로 청평들 한가운데에 있다.
산막골못 마을 서쪽의 산막골에 있는 못으로 못 2개가 나란히 있다. 천평들에 물을 공급하는 저수지로 ‘청지’라고도 한다. 일제 때 막았는데 사라호 태풍으로 터진 것을 미국 구호단체의 원조로 1962년에 다시 막았다.
석문 자연석이 마치 돌문처럼 양쪽에 나란히 서 있다. 그 가운데 한쪽은 최근 길을 넓히면서 깨어내고 시멘트로 발라 훼손되었다.
진당걸 큰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당수나무가 서 있는 지점을 말한다.
청령교회 1907년 3월 세워진 대한예수교 장로교회로 원골 마을회관 앞에 있다.
하천 및 농수로 정비했으면
이 마을은 아직 경지정리가 안되어 있어 농수로 정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농로도 좁고 위험하다고 한다. 따라서 농수로 정비와 농로 포장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마을 앞 도로가 좁고 인도조차 확보되지 않았는데 차량통행이 많고, 차들이 과속하는 바람에 위험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도로는 안강-현곡 간 새 도로가 개통되면 다소 해소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도로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진입로가 철길을 건너야 하는데 버스진입이 안되기 때문에 불편이 많다고 한다.
또 이 마을에는 산막골에 못이 2개 있는데 그 아래 하천이 제대로 정리가 안되어 있어 비가 많이 오면 제방이 터져 물난리를 겪는다고 한다. 이 하천의 정비가 시급한 상황이다.
청령 출신으로는 공우섭(76·전 안강읍장), 공선섭(70·전 외무부 차관), 최해욱(69·전 한국비료 공장장), 이대원(68·예비역 육군 중령), 최해춘(63·전 농촌진흥청), 이대철(60·전 나원초등학교 교장), 김병열(60·예비역 육군 중령), 이대성(예비역 육군 중령), 이상모(57·경주시청 총무과장), 한수식(43·금오공대 교수), 최창식(31·해군 소령)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