섶이 많아 ‘섶’마을→ ‘상섶’, ‘하섶’ → ‘상신(上薪)’, ‘하신(下薪)’ 충신 효자 많이 배출했던 반촌 신계리에 갔던 지난 14일은 경주에 첫눈이 왔다. 밤새 내린 눈으로 토함산과 불국사가 하얗게 눈 단장을 한 채 취재진을 맞았다. 눈 온 뒤라 추울까봐 두꺼운 옷을 준비했지만 양지바른 곳의 눈이 다 녹아내릴 정도로 날씨가 포근했다. 신계는 토함산 서쪽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불국사가 있는 불국동의 진현동과 외동읍 괘릉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일찌기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반촌이며,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아 왔기에 마을인심 또한 후한 것으로 잘 알려진 마을이다. 예로부터 충신과 효자를 많이 배출했던 이 마을은 신도비 2기를 비롯한 서당, 정자, 재실 등이 즐비해 한눈에도 예사 마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계는 동쪽으로 토함산을 끼고 양북면 범곡리와 장항리에 닿아 있고, 서쪽은 구정동, 남쪽은 괘릉리, 북쪽은 불국동에 접해 있다. 경주에서 이 마을에 가려면 7번 국도를 타고 울산방향으로 가다가 불국사를 지나 영지-불국사를 잇는 새로 난 영불로를 따라 좌회전하여 불국사 쪽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펼쳐진 마을이 신계다. 영불로를 지나쳐 다음 신호등에서 좌회전해서 올라가도 된다. 경주시청에서 이곳까지는 16km, 20분 거리이다. 일제 때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신계’ 본래 이 마을은 토함산 서쪽기슭의 구릉지로 섶이 많아 ‘섶’이라고 불린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섶에’, ‘서배(西培)’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윗마을은 ‘상섶’, 아랫말은 ‘하섶’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상신(上薪)’, ‘하신(下薪)’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여러 갈래의 도랑도 많았다고 하며 특히 ‘사드랫거랑’이 있어 ‘사드래’, ‘서드래’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런데 이 마을이 ‘신계(薪溪)’로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상섶, 하섶, 진현, 내동면 광산리 각 일부를 병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본래 ‘상섶’, ‘하섶’인데 ‘신계’라고 한 것은 일제 때이다. ‘감산사’, ‘밤갓’(지금의 괘릉)도 상섶이고, 영지의 ‘영못안’도 하섶이었다. ‘능지’, ‘볕골’과 상섶, 하섶 일부를 편입해 ‘괘릉’이 되었다.”고 했다. 200여 가구에 500여 명 살아 이 마을은 크게 ‘상섶’과 ‘하섶’으로 나누고, 상섶은 다시 ‘큰마을’, ‘윗마을’, ‘공주골’, ‘뒷말’, ‘중간마을’ 등으로 세분할 수 있다. 주 작물은 벼농사이고, 그 밖에 한우와 배농사를 짓고 있다. 한우의 경우 68가구에서 700여두를 기르고 있고, 배는 10여 가구에서 5ha를 경작하고 있다. 이 마을은 총 200여 가구에서 230세대가 생활하고 있으며, 주민 수는 총 514명으로 남자가 246명, 여자가 268이다. 이 마을에는 큰마을, 공주골, 뒷말 등에 김해김씨 60여 호가 살고, 윗마을을 중심으로 인천이씨 35호, 큰마을에 경주김씨 20여 호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이능달(100세·양곡어른) 할아버지로 아직 정신도 맑고, 술과 식사를 정상적으로 한다고 한다. 최근에 술이 해롭다는데 이제 끊어야겠다며 덜 자신다고 한다. 고기도 살코기는 맛이 없고 뼈 있는 고기를 달라고 할 정도로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다리에 힘이 없어 출입이 좀 어려운 상태였다. 김해김씨, 인천이씨, 경주김씨 집성촌 상신(上薪) ‘상섶’이라고도 하며, 서배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상리(上里)’라고도 한다. 하신(下薪) 서배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하섶’이라고도 한다. (45가구) 큰마을 상섶 입구 앞솔밭 옆에 있는 큰 마을로 ‘앞마을’이라고도 한다. (중간마을 포함 80가구) 중간말 앞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경암정과 삼백정이 이 마을에 있다. 웃말 상신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윗마을’이라고도 한다. 당나무와 상신사, 충강공신도비가 이 마을에 있다. (25가구) 공정골 상신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8자(八字)로 생긴 두 능선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공정곡(公政谷)’, ‘공주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뒷말 위에 있다. (35가구) 뒷말 상신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뒤에 있는 마을이라 ‘뒷마을’, ‘후리(後里)’, ‘뒷말’이라 불렀다고 한다. (15가구) 호림정 대들보 될 번한 당나무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 새벽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 뒷마을 입구에 있는 수령 350년의 느티나무가 당나무로 숭상되고 있다. 이 당수나무에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일제강점기에 왜놈들이 안압지 임해전을 짓는데 대들보를 하기위해 이 당수나무를 베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동민들이 가시로 나무를 막아 필사적으로 보호했다고 한다. 결국 이 나무 대신 옆에 있는 다른 나무를 베어가서 임해전 정자의 보로 사용했다. 이 정자는 1970년대에 호림정으로 옮겨졌는데 지금의 호림정의 대들보가 그 나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단종폐위에 맞섰던 충강공 충강공신도비(忠剛公神道碑) 충강공 이징옥(李澄玉)의 신도비로 사당이 있던 상신 입구에 40여 년 전에 세웠다. 함길도 절제사로 있던 공은 단종폐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피살되었으며 가족들도 함께 처형당했다. 그러나 막내아들 이윤연(李沇淵)만 살아남아 유모의 등에 업혀 양산에 있던 큰집에 갔으나 역적이라며 쫓아내어 이곳으로 와서 정착했다고 한다. 이 신도비는 토함산을 뚫어 장항으로 연결하는 터널의 진입로 부근에 있어 곧 옮겨야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동엄공 신도비(東 公神道碑) 김해인 동엄(東 ) 김득복(金得福)을 기리기 위해 그 후손들이 세웠다. 공은 임진왜란 때 3남영장(三南領將)을 지냈고 가의(嘉義)의 품계에 올랐다. 선무원종1등공신으로 봉해졌다. 본래 이 자리에는 동엄공의 사당과 살던 집이 있던 곳이었는데 1977년에 헐고 그 자리에 신도비를 세웠다고 한다. 경암정(敬菴亭)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경주인 경암 김지춘(金之春)을 추모하여 1946년 그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삼백정 앞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삼백정(三栢亭) 경주인 김영택(金永澤)이 1928년에 건립했다는 정자로, 경암정 뒤에 있다. 정원에 잣나무 세 그루를 심고 그 푸른 기개를 흠모하며 은거했다고 전하는 이 정자는 높은 언덕배기에 지어 전망이 좋고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양쪽에는 방을 배치했다. 임란창의 충신들 줄지어 동엄정사(東 精舍) 임진왜란 때 창의한 공신 김득복(金得福)을 추모해 세운 정자이다. 이 정사는 본래 1600년경에 몽양재라는 서당으로 지었던 게 허물어지고, 40여 년 전에 다시 지었는데 또 허물어진 것을 지금의 자리에 옮겨서 1958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낙성식 때 호를 따서 동엄정사로 고쳤다고 한다. 상신사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을 추모하여 인천이씨(仁川李氏) 문중(門中)에서 1957년에 지은 재실로 웃마을에 있다. 본래 경모재(景慕齋)였는데 10년 전에 3문과 서재, 묘우, 제단을 새로 지으면서 ‘상신사’로 고쳤다고 한다. 경모재 단소(景慕齋壇所) 충강공(忠剛公) 이징옥(李澄玉)을 제향하는 단소(壇所)로 상신사 경내에 있다. 1979년 단(壇)을 설치하고 단비를 세웠다고 한다. 청봉서당(晴峯書堂) 김해인 고헌(高軒) 김덕련(金悳鍊)이 1921년에 세운 서당으로 많은 후진을 배출했다고 전한다. 고헌문집 3책과 별책 1권이 전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서당은 낡고 허물어져 가고 있다. 아이들 노래하듯 나지막한 산 가동산(歌童山) 공주골 위에 있는 토함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나지막한 산으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듯이 나지막한 산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학산 모양이 학처럼 생긴 산으로 가동산 남쪽에 있다. 독좌산 학산 남쪽에 홀로 뚝 떨어져 있는 산인데 마치 아이가 홀로 앉아 있는 형국이다. ‘도끼산’이라고도 한다. 한무덤산 무덤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산으로 앞솔밭 동쪽에 있다. 한씨의 묘가 있었다고도 하고, 혹은 손(孫) 병사의 무덤이라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하므든산’이라고도 한다. 기단이 2중으로 있는 규모 있는 묘이다. 감산사 절이 손 병사 때문에 망했다고도 전한다. 서뱃재 서배에서 양북면 장항리의 탑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속재 뒷말 동쪽에서 양북면 장항리의 탑정으로 넘어가는 고개였는데 지금은 길이 없다. 동산재와 서배재 사이에 있다. 앞솔밭 큰마을 앞에 있는 소나무 숲. ‘중이골’이라고도 한다. 개불등 상신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지금은 개발하여 과수원을 만들었다. 너구릿등 지형이 너구리처럼 생긴 등성이로 뒷말 끝에 있다. 동말리 윗마을의 뒷등에 있는 등성이로 마을 동쪽머리이다. 큰마을 뒤쪽에 있는 등성이다. 송정(松亭)등 공주골 앞쪽에서 성짓골에 걸쳐 있는 등성이다. 성짓골 독좌산과 학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이다. 뒷골 하신 뒤에 있는 들인데 골짜기에 있는 들이다. 배암골 배암(뱀)이 많이 서식했던 골짜기로 웃골 남쪽에 있다. 복캣골 성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그 안에 폭포가 있어서 ‘폭캐’라고 하던 게 변해서 ‘복캣골’이 되었다고 한다. 게가 엎드린 형상이라 ‘복해곡(伏魚豈 谷)’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골 웃말 위 서배재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초막골 초막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서배재 남쪽에 있다. 괘릉리와의 경계지점에 있다. 한이골 서배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로 ‘대리동(大里洞)’이라고도 한다. 골짜기가 깊어 ‘아흔아홉골’이라고 부른다. ‘하이골’이라고 부른다. 탑 기단면석이 정자 기단석으로 탑거리 탑이 있었던 논으로 큰마을 동남쪽에 있다. 주민들은 이곳이 본래 감산사 터이고 지금의 감산사는 암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 이곳의 탑이 대단히 컸다고 한다. 이 탑의 기단면석(基壇面石)으로 보이는 일부가 현재 경암정과 동엄정의 주춧돌로 사용되고 있어 탑이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이곳이 감산사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어 같은 사역이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주민들의 주장처럼 실제로 이곳이 감산사 터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봇거리 웃말 동쪽에 있는 곳으로 근처에 보가 있어 ‘봇거리’라고 한다. 구터 옛 집터가 있었던 들로 하신 동쪽에 있다. ‘구기(舊基)’라고도 한다. 인천이씨들이 처음 자리 잡고 살던 곳이라고 전한다. 너구릿등 들 너구릿등 밑에 있는 들이다. 대서들 물이 없고 가뭄을 잘 타는 한발지역이라 ‘대서들’이라고 한다. 상신 북쪽에 있다. 바들기 큰마을 앞들이다. 솔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이라 ‘송봇들’이라고도 한다. 사들이들 하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들로 ‘사등이들’이라고도 한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리는 내를 ‘사등이천’인데 사등이들이 변해서 ‘사들이들’이라고 한다고 한다. 소뒤 뒷등 뒤뜰에 있는 들로 솔밭 뒤가 됨으로 ‘소뒤’라고 했다고 한다. 솔보 바들기에 물을 대는 보로 ‘송보(松洑)’라고도 한다. 양달봇들 양달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들로 하신 동북쪽에 있다. 외솔배기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던 논으로 상신 동남쪽에 있다. 지금은 소나무가 없다. 염싯보 양달보 동쪽에 있는 보로 ‘염수보’라고도 한다. 공주골 뒤에 있다. 양달보 양지쪽에 있는 보로, 공주골 앞에 있다. 양달봇들에 있다. 집앞보 웃말 앞에 있는 보다. 하보(下洑) 하신 남쪽에 있는 보다. 마을회관 좁고 낡아 새로 지었으면 신계는 경로당과 회관이 좁고 분리되어 있는데 통합해서 크게 지었으면 한다. 마을회관을 지은 지 오래되어 좁고 불편해 신축을 바라고 있다. 공주골에서 진티로 올라가는 마을 안길이 공사를 하다가 중단됐는데 이를 재개해서 완공해야 한다. 통행에 애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이 마을출신으로는 이진구(61·경주시의원), 이정구(61·전 경주시 도시건설국장), 김채한(60·매일신문 편집국장), 김병도(58·보덕동장), 이동욱(58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김병욱(52·경북개발공사 전무이사), 이석윤(44·예비역 육군중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협조해주신 김병규이장, 김진석 지도자와 도움 말씀을 주신 김수정(68)님께 감사드린다. 글 김거름삶 사진 최병구 기자 정리 이채근 기자 자문 허계수(족보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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