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 내남면 용장3리(茸長3里) 신라 때 큰절 천룡사 있던 󰡐천룡󰡑 돌틈에서 물이 새어나와 󰡐틈수골󰡑 가을들녘에 벼가 누렇게 황금색으로 물들어 갈 즈음이면 능이, 송이, 표고, 싸리, 영지, 운지 등 갖가지 버섯들이 올라온다. 특히 경주 남산에는 송이가 맛과 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용장3리 산림계는 1959년에 조직되어 약 반세기에 이르는 지금까지 경주남산의 수리산 일대의 산지를 관리해 오면서 이곳에서 나는 송이에 대한 관리도 동계인 산림계에서 관장하고 있다. 용장은 경주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용장사(茸長寺)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용장󰡑이라 했다고 한다. 또 옛날에 형상강 상류인 기린내가 흐르는 이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 풀용(茸)자와 긴장(長)자 󰡐용장󰡑이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용장사지 일대에 시느리대(신이대)가 많아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용장은 경주에서 35번 국도로 언양방면으로 삼릉과 내남교도소를 지나면서 남산 기슭에 의지하여 자리한 마을이다. 경주남산을 경계로 동쪽은 도동, 남쪽은 노곡에 맞닿아 있고, 북쪽은 탑정동 배리에, 서쪽은 기린내를 끼고 망성, 부지, 이조에 인접해 있다. 이 마을은 수리산, 용장사지, 용장계곡, 천룡사지, 와룡사 등 경주남산의 주요 유적들이 많이 분포해 있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경주남산의 대표적인 명소의 하나다. 용장․배양골이 용장1리, 냄비(부지) 일부와 머소․강정․등알이 용장2리, 틈수골․천룡이 용장3리, 비파(앞비파․뒷비파)가 용장4리를 이루고 있다. 밀양박씨 집성촌 용장3리는 일명 󰡐틈수골󰡑이라 부르는 천룡사로 오르는 와룡골 어귀에 있는 마을과 천룡사지 일대의 󰡐천룡마을󰡑을 말한다. 이 마을은 남자 70명, 여자 80명으로 총 150명이 50가구를 이루고 생활하고 있다.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지금도 밀양박씨 1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이 마을은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그 외에 딸기를 재배하고 있다. 한우는 집집마다 1, 2마리 기르는 정도이다. 딸기의 경우 3농가에서 7천여평을 경작하여 연간 약 1억원 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한귀연(97․금오댁)할머니로 술 담배는 하지 않고 식사는 뭐든 다 잘 먹는다고 한다. 아직 눈과 귀가 총명하고 정신도 맑고 건강하지만 바깥출입은 어렵다. 이 마을에는 90넘은 할머니가 3명이나 된다.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보름에 동제를 지내왔으나 1981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당목 이 마을 당나무는 팽나무로 둘레가 9.6m로 대단히 큰 나무였는데, 35번 국도를 확장하면서 도로부지에 들어가는 바람에 고사해 베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후계목으로 수령 30년의 느티나무를 심어 놓았다. 두 딸을 위해 천룡사 중건 틈수골(闖水谷) 천룡사(天龍寺)가 있는 골짜기에서 흐르는 여울물이 돌틈을 통해 항상 마르지 않고 흐른다고 해서 󰡐틈수골󰡑, 󰡐수동(水洞)󰡑 또는 󰡐극수동(隙水洞)󰡑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의 물을 마을에서 식수로 이용하고 있다. 천룡(天龍) 신라 때 큰 절이었던 천룡사가 있던 마을이라 󰡐천룡󰡑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수리산 용바위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 따라 󰡐천룡󰡑이라 했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고려 때 천룡사를 중건한 최재안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린 자신의 두 딸 천녀와 용녀를 위하여 절을 짓고 딸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고 했다고도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는 13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절과 식당을 합해 5가구만 있다. 경주남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고위산(高位山 494) 경주남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줄봉산󰡑, 󰡐수리산󰡑, 󰡐수리봉󰡑, 󰡐천황산󰡑, 󰡐천룡산󰡑, 󰡐하누재󰡑라고도 한다. 천룡사터 옛날 신라시대 큰 절이었던 천룡사가 있던 터로 지금은 그 위쪽에 천룡사라는 작은 절이 있고, 천룡사터는 도문스님이 오래전부터 천룡사 복원을 위해 이 일대를 매입하여 도량을 꾸리고 있으며 최근 탑을 복원하였다. 천룡사는 절을 지을 때 이곳에서 용이 승천했다고 하며, 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천룡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고려시대에 최재안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린 두 딸 천녀, 용녀를 위해 중건했다고 하며, 이때부터 천룡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꺼치말 진등북쪽에 있는 거친 골짜기를 말한다. 나반골 천룡사 탑이 있는 납작한 골짜기이다. 밭골짝 밭이 많이 있는 골짜기이다. 복해골짜기 천룡마을 앞에 푹 파인 골짜기를 이른다. 순산골 대부분이 바위산이고 민둥산인데 비해 유독 이곳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숲을 이루고 있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와룡골 일대이다. 어두묵골 살골짜기가 아주 깊어서 어두운 골짜기이다. 용이 누워있는 형세 와룡골 마치 용이 누워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 지금 와룡사가 들어선 일대이다. 󰡐순산골󰡑이라고도 한다. 작은 어두목골 어두목골 중에서 작은 골짜기이다. 진등골짝 진등이 있는 골짜기이다. 천주암골짜기 옛날 천주암이라는 절이 있었던 골짜기이다. 큰골 틈수골 마을 안쪽의 가장 큰 골짜기를 말한다. 와룡골 남쪽 골짜기이다. 큰 어두목골 어두목골 중에서 큰 골짜기이다. 공동산 일제시대 이후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묘지로 쓰도록 지정한 산이다. 고깔보만디 산 등성이가 마치 고깔처럼 생겼다고 한다. 능번디기 능처럼 생긴 큰 무덤이 있는 산등성이다. 넓고 펀펀한 등성이를 󰡐번디기󰡑라고 한다. 뒷갓비알 마을 뒷산의 비탈진 산기슭을 말한다. 노루가 자주 나타난 󰡐노리미기󰡑 노리미기 오산골에서 천룡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노루가 자주 나타난다고 한다. 배바위 천룡사 뒤에 있는 바위로 배같이 생겼다고 해서 󰡐배바위󰡑라고부른다. 또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용바위󰡑라고도 한다. 보문갓 보문 사람이 소유한 산으로 이곳에 보문 이씨의 묘가 있다고 한다. 비선미땅 비석이 서 있는 묘가 있는 곳을 말한다. 소새등 소의 혀처럼 생긴 산등성이를 말한다. 애기등미땅 옛날 애기무덤이 있던 곳이다. 진등 등성이가 긴 천룡사로 오르는 북쪽 등성이를 말한다. 못논도가리 옛날에 못이었던 곳에 논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말들 옛날에 원집이 있던 곳에 들이 생겼다. 마을 북편에 있다. 알바위(성혈) 3군데 와룡동천 와룡골에 있는 폭포인데 지금은 와룡사가 들어서면서 물 흐름을 바꾸어 놓아 폭포에 물이 없다. 용꼬샘 마치 용이 누운 형상을 하고 있는 산등성이 끝에 있는 샘이다. 와룡사 부근이다. 약수탕 천룡에 약물이 나는 곳으로 옛날에는 물맞이 하는 물탕이 있었다고 한다. 와룡못 와룡골에 있는 못으로 신라시대에 막았다고 한다. 와요지 신라시대에 기와를 구웠던 곳으로 천룡에 1곳, 마을 앞에 1곳, 마을 뒤에 1곳 등 3곳에 있다. 도요지 신라시대에 토기를 구웠던 자리이다. 틈수골에 있다. 야철지 쇠를 부린 곳으로 어두목골에 있다. 성혈(性穴) 이 마을에는 성혈이 3군데에 있다. 성혈이란 바위 표면에 홈처럼 파여진 구멍을 말한다. 크기는 직경 5~10cm의 정도에 깊이 3~5cm 내외가 대부분이나 15~20c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성혈이 파여져 있는 바위를 󰡐알바위󰡑, 󰡐알터󰡑, 󰡐알구멍󰡑, 󰡐바위구멍󰡑이라고도 한다. 관광객 위한 공중화장실 주차장 필요 틈수골은 경주남산의 최고봉인 수리산이 흘러내리면서 빚어놓은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라 유난히 산세가 아름답고 물도 좋은 살기 좋은 마을이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다. 국립공원지역이라 사유재산권이 제한되고 건축행위도 제한 받고 있고, 골기와지역으로 애로사항이 많다고 한다. 대부분의 농토가 기린내 건너편에 있는데 거랑을 건너는 다리가 없어 이조, 용장1리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마을에서 기린내를 건너는 다리가 있었으면 한다. 또 이 마을은 천룡사와 수리산을 오르는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주말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든다. 그러나 주차장이나 공중화장실이 갖추어지지 않아 주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주차장과 공중화장실 설치가 시급하다고 한다. 그리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바람에 골치를 앓고 있다고 한다. 마을을 이용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고 가는 비양심적인 행동은 삼가야겠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박동율(51․경북대 법대 교수), 박정수(50․삼성항공 영업부장), 법수스님(46․동국대 교수), 박상철(45․국정원), 박덕환(44․세무사), 석초 최경춘(41․서예가) 등이 있다. 바쁘신 중에도 마을 안내에 애써주신 서상길 이장님과 박기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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