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리(柯亭里) 가죽나무 정자 있어 ‘정자마을’→‘가정(柯亭)’ 천도교주 수운 선생의 탄생지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이다. 푸른 들녘엔 벼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사과, 배, 밤 등 갖가지 과일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현곡배의 재배단지인 가정리에도 배들이 봉지에 싸인 채 출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주의 대표적인 명품 농산물의 하나인 현곡배를 생산하는 현곡배 재배단지가 올해 농림부로부터 원예전문수출단지로 지정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한 때문일까? 아직은 봉지에 싸인 채 나무에 매달린 저 배들이 세계무대를 누빌 것이라고 생각하니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가정은 구미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이다. 가죽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정자나무마을’, ‘정자마을’, ‘가정자(柯亭子)’ 혹은 ‘가정(稼亭)’이라 불렀다고 한다. 동학의 발상지이며 성지인 용담정과 수운 최재우 선생의 생가 터와 묘지, 유허비가 있는 동학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마을이다. 경주에서 금장, 현곡을 거쳐 영천 고경으로 넘어가는 927번 지방도를 따라 8km(경주시청 기준 12분 거리) 가면 디자인고등학교가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남사저수지까지 좌우로 펼쳐진 마을이 가정이다. 디자인고등학교가 있는 갓질(지곡)이 가정2리이고, 도로 남쪽으로 용담정이 있는 매롱골(마룡골)이 가정3리, 그 북쪽에 남사저수지 아래에 있는 가정마을이 가정1리이다. 용담정이 있는 가정 3리(마룡골)는 이미 소개한바 있고, 이번호에는 가정1,2리를 중심으로 소개하고자한다. 세계로 수출되는 현곡배 가정(柯亭) 현재 가정1리에 해당하는 가정마을은 가죽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하여 ‘정자마을’, ‘정자나무마을’, ‘가정자(柯亭子)’, ‘가정(稼亭)’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가정(稼亭)을 ‘가정(柯亭)’이라 고쳐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정정자’라고 하던 정자가 있던 곳에 지금은 가죽나무는 없고,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었으며, 최근에 만든 정자가 있다. 남사저수지 아래에 있는 이 마을은 수운 최재우 선생의 생가 터와 유허비가 있다. 동제 매년 정월보름날 동제를 모신다. 당목 마을 입구에 있는 약 500년 된 느티나무이다. 가정1리는 총 55가구에 1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배(6가구), 한우(5가구 50두)를 기르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최미연(89 이조댁), 최순남(89 대골댁) 할머니다. 두 분이 동갑내기로 나란히 마을회관에 나와 계셨다. 갓질 현재 가정2리에 해당한다. 본래는 이 마을을 개척한 여강이씨(驪江李氏)들이 마을 뒷산인 말림갓 밑에 마을이 자라잡고 있다 하여 ‘갓골’이라 불렀다고 하며, 또 조선 헌종 때의 선비 지곡(芝谷) 이능찬(李能燦)의 호를 따서 ‘지곡(芝谷)’ 혹은 ‘지곡(志谷)’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가정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가정2리는 총 43가구에 110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벼농사와 배(4가구), 한우(12가구 110두)가 주 생산물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이원육(86 모서어른) 할아버지로 동제도 없고, 당나무도 없다. ‘양반도 천민도 없다’ 수운 최제우유허비(水雲 崔濟愚遺墟碑) 동학의 창시자이자 천도교 교주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유허비로 1971년에 가정리 315번지에 세웠다. 수운공은 경주최씨(慶州崔氏)로 1824년 이 마을의 가난한 선비 최옥과 재가녀 한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가녀의 자식이라는 신분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공은 일찍이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높은 뜻을 지니고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1855년 어느 스님으로부터 받은 ‘천서(을묘년에 받아 을묘천서乙卯天書라 한다)’를 통해 도를 깨치고, 1857년 천성산 내원암 또는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를 하였다. 1859년 경주로 와서 용담정(龍潭亭)에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한 수도를 시작하여 다음 해 유불선(儒佛仙)의 동양 3교의 바탕 위에 동학의 교리를 완성하였다. 이를 천도교라고 하며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양반도 천민도 없고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교리가 사람들의 호응 받아 교세가 확장되자 유생들과 관의 탄압을 받았다. 공은 1862년 남원 교룡산성에 있는 은적암으로 피신해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동학론(東學論)』을 집필했다. 교세가 확장되어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해 1863년에는 접소가 14개에 이르렀으며 제자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을 계승시켜 교주로 삼았다. 공은 1864년 용담정에서 선전관 정운구(鄭雲龜)에게 체포되어 혹세무민의 죄로 대구에서 사형되었다. 이것이 뒤에 동학혁명의 계기가 되었는데 공은 1907년에 복권되었다. 수운 최제우 선생 집터 동학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의 집터이다. 지금 유허비가 서있는 자리 동편이다. 이장군의 묘 ‘이무덤’ 가정리 고분군(柯亭里古墳群) 가정에 있는 고분군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원형분(圓形墳)이다. 장대석으로 2단계 호석이 둘러져 있는데, 일제 때 도굴을 당했다고 하며, 현재 1기(基)가 있다. 이 장군의 묘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이무덤’이라고도 한다. 마을 뒷산에 있다. 원사재(遠思齋) 가정리 261번지에 있으며, 의성인(義城人) 평산(平山) 김성욱(金成頊)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남사에 세웠는데, 중간에 불타버린 것을, 가정리에 1957년에 다시 세웠다. 우인정(友仁亭) 조선 헌종 때의 선비 근지당(近志堂) 이능찬(李能燦)을 추모하여 그의 문하생들이 1914년에 건립하였다. 이 공은 여주(驪州)인으로 헌종 15년(1849)에 태어났다. 그는 많은 후진을 양성했다고 한다. 갓질에 있는 우인정(友仁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가운데 마루, 양쪽에 방을 배치했으며 팔작지붕이다. 애일당(愛日堂) 터 조선 숙종 때의 선비 이극중의 호를 따서 애일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건물은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60년대에 중건했다. 용꼬리로 산을 치고 벼락산 용이 등천하면서 꼬리를 칠 때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용복골 동쪽에 있는 산이다. 두리봉 절골 위에 있는 산으로, 봉우리가 둥그렇게 생겼다. 덕고개 갓질 동북쪽에서 무과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미륵골재 미륵골에서 내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서낭미기 가정리에서 내태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미륵골재를 말한다. 장구매기 가정 서남쪽에서 건천읍 용명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지형이 마치 장구처럼 잘록하게 생겼다. 범이 마을 개들 물고 가 개장곡(盖藏谷) 옛날에 범이 내려와 마을의 개들을 물고 가서 잡아먹었다고 하는 골짜기이다. 갓질 북쪽에 있으며, ‘개장골’이라고도 한다. 광줏골 가정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작은 절이 있었다고 하며, 광주곡(光州谷) 혹은 광짓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릿골 가정 서남쪽 높은 곳에 있는 골짜기로, 다리골, 교곡(橋谷)이라고도 한다. 마을에서 다리건너편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미륵골 가정리 소동골 북쪽의 골짜기로, 미륵이 있었다고 한다. 이 골짜기를 넘어가면 내태가 된다. 밤아골 밤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로, 개장골 북쪽에 있다. 지금도 밤나무가 일부 남아있다고 한다. 불당골 진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불당(佛堂)이 있었다고 한다. 두리봉 밑에 있다. 성짓골 밤아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섶바대 가정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섶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골 가정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아이가 죽으면 이곳에 많이 묻었다고 한다. 미륵골 아래에 있다. 용복골 가정 뒤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치 용이 엎드려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용복곡(龍伏谷)’이라고도 한다. 헌팃골 옛날에 헌집이 있었다는 가정 동쪽 골짜기. 회양골 용이 하늘에 올라가면서 이곳에서 비잉 돌았다고 하는 골짜기로 ‘회룡골(回龍谷)’이라고도 한다. 가정 뒤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장군들이 놀던 윷판 윷판배기 남사못 아래쪽에 있으며, 옛날 장군들이 놀았다고 전하는 윷판이 있었다고 한다. 큰 바위가 여기저기 윷판 모양으로 놓여 있었는데, 가운데 큰 바위에는 윷판이 그려져 있고 장정 5~6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컸다고 한다. 남사못이 생기기 전에는 지금의 못 자리에도 이 돌들이 놓여 있었다고 하는데, 근래 농지정리를 하면서 모두 묻어 버렸다고 한다. 깨구리바우 모양이 마치 개구리처럼 생긴 바위로, 장구매기 위에 있다. 이 바위에 서서 보면 건천읍의 대곡이 내려다보인다. 구미산 정상줄기에 있다. 광줏골못 광줏골에 있는 못으로 옛날에 막았다. 바우들 갓질 북쪽에 있는 들로, 이 들 가운데에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바우들’인데 지금은 바위가 없다고 한다. 새밭두들 갓질 서쪽 둔덕에 있는 들로, 옛날 이곳은 속새풀밭이었다고 한다. 집앞들 애기바댓보 동쪽에 있는 들로 가정 앞이 된다. 한들 남사저수지 아래에 있는 넓은 들로 ‘대평(大坪)’이라고도 한다. 가정초등 터에 디자인고 굼보 남사저수지가 생기면서 침수되고 없어진 보이다. 새보 동쪽 구석에 있었다고 한다. 섶바대 보 섶바대에 물을 대는 보를 말한다. 애기바댓보 남사저수지에 침수되어 버린 섶바대 동쪽에 있던 보이다. 집앞보 집앞들에 물을 대던 보로 남사저수지에 침수되었다. 경주디자인고등학교 갓질 마을 입구에 있는 이 학교는 본래 가정초등학교였는데 남아있던 건물 일부와 신축건물을 짓고 2001년 3월 경주디자인고등학교가 개교하였다. 가정초등학교는 1949년 9월에 개교하여 졸업생 18,668명을 배출하고 1999년 9월 현곡초등학교에 통합되고 폐교했다. 가게, 술, 화투 없어 현곡에서는 ‘1하구 2가정’이라고 할 정도로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가정리, 이 마을에는 최근에 자동차부품회사 5개가 들어와 있다. 이 마을은 사람들이 대체로 온순하고 인심이 좋아 마을분위기가 화목하다고 한다. 마을에 술 마시는 사람도 거의 없고, 그리고 또 화투놀이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가게도 없다고 한다. 70년대 초까지는 가게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당장 생활하기에 특별히 불편한 주민숙원 사업은 없다고 한다. 주민들의 생각이 얼마나 긍정적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태식(58 탑정동장), 이수준(56 창원 두산중공업 전무), 최상운(51 경주시 국책사업단 행정지원과장), 김형식(44 육군 중령) 등이 있다. 마을취재에 관심과 협조를 아끼지 않은 전점득 면장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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