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식문화와 사찰음식
정청노 교수(영산대)
우리 민족 생활사 측면에서 사찰음식은 다양한 배경에서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역사문화음식의 중요한 콘텐츠로 자리하였다. 특히 신라사회에서 그 역할이 타 왕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비교 우위의 자리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한 배경은
첫째, 왕조 시대에 왕실음식을 담당할 후계자 육성 과정은 지극히 제도적으로 유지되었는데, 우선 교양 있는 소녀들이 유년시절에 왕궁으로 선발되어 왕실의 예법과 왕실 음식제작을 교육 받고 평생을 왕실의 음식을 연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후일 단계별 경쟁을 거쳐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 음식 담당 상궁으로 진급하여 왕실의 일상식과 대소연회, 제례, 통과 의례, 대관식 등의 음식을 총괄하다 나이가 연로하여 수라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어도 퇴궁이 허락되지 않고 일생을 궁에서 마감하는 것이 왕실법도이다. 국가통치자의 식습관과 왕궁내실의 음식관련 정보를 속세로 부터 보안하고자 하는 목적이 개인의 삶의 질 보다 우선하였던 국가정서에서 당연한 조치였을 것이다. 다만 노년에 삭발하고 불가에 출가를 결심한 경우에만 인성을 검토하여 개인 퇴궁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결과는 역사적으로 사찰음식과 궁중음식이 조우하는 자연스러운 기회가 되었고 결국 궁중의 음식이 사찰음식과 교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궁중 수라간 출신 원로들이 말년에 출가하여 궁중에서 수십 년간 닦은 조리내공을 사찰음식에서 창작을 통하여 적용하였던 것이다. 또한 왕족들의 방문이 잦은 사찰의 경우 이와 같은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후대에 궁중음식이 사찰음식에 달빛처럼 은은하게 녹아드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근대에 전해온 사찰음식과 왕실음식의 메뉴들을 눈 여겨 관찰한다면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왕실음식과 사찰음식의 식문화적 진화의 뿌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둘째, 사찰음식이 신라음식과의 관계에 있어서 강한 사회역사적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라사회는 역사상 당(唐)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었고 그 후 국가 종교로 근 1000년간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 숭불하였던 시기이다. 이시기에는 사례로 신라 사회는 분황사, 황룡사 등 신라대찰들과 수많은 관련 말사들이 거주 지역인 서라벌의 다운타운에 위치하고 스님과 대중들이 초하루, 삭망은 물론 격이 없이 조석으로 수시로 왕래하는 자유로운 불국(佛國) 커뮤니티를 형성하였던 불교시민 사회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신라의 종교와 식문화가 역사 속에서 상호융합 되는 사회생활 양식에서 신라의 음식은 사찰음식, 대중음식이 구분 없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상방이 식 문화적 변용을 거친 결과, 과도한 육식을 절제하여 식문화사적으로 공통분모를 갖는 동시대의 초록동색 음식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혹자는 유명 관광지에서 권할 만한 지역 주제음식이 없다고 평하지만 경주의 경우 지역의 정체성을 반영한 역사문화 관련 음식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건강음식에 대한 현시대의 트렌드를 감안하고, 지역 사찰음식과 신라사회간의 식 문화적 개연성 대한 관심과 고찰을 동시적으로 고려한 개념이 뒤받침이 된다면 합리적인 지역 특화 음식에 대한 연구가 이루질 것으로 사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