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신 최진립 장군의 집 ‘충의당’
이조는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마치 떠나가는 배의 형세를 하고 있는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은 배가 침몰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우물을 파지 않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의 명장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1568~1636) 장군이 살았던 곳이며 공의 3째 아들(東亮)로 이어지는 세계적인 명문가 교리최부자가 지금의 교동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만석꾼에 12대 진사의 기틀을 마련했던 배경이 된 마을이기도 하다.
이 마을은 개400년 전통 이은 최부자집 배출
의 무덤으로 알려진 큰 무덤이 있어 ‘개무덤’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직한 개의 무덤이라는 이야기와 신라 진성여왕의 간부인 각간 위홍의 무덤으로 질녀인 진성여왕과 놀아난 그의 행실에 빗대어 개무덤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같이 전해오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이곳이 미역내, 별내, 박달천의 세 거랑이 만나는 지점으로 갯거랑이 모인다고 ‘갯모듬[浦會]’이라 부르던 것이 변하여 개무덤이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이 마을이 ‘포회(浦會)’로도 불렸다고 한다. 또 마을의 안산인 고위산의 천룡바위가 마을 앞 냇물에 비치는 풍광이 아름다워 ‘가암(佳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개무덤이라는 마을이름이 이조가 된 것은 예전에 이곳이 윤씨네들이 10여 호가 살았는데 이들이 마을을 많이 도왔다고 해서 ‘이조(伊助)’라고 했다고 한다. ‘이조(伊助)’가 300여 년 전의 문헌에 이미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이조라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조는 면사무소가 위치한 큰 마을인 ‘개무덤(이조)’을 이조1리, 그 남쪽 거랑 건너편의 ‘새각단(전포)’을 이조2리, 동쪽 산기슭에 자리한 ‘용산’을 이조3리로 구획하고 있다.
행주형국(行舟形局)의 명당
이조1리는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정무공이 살았던 집인 종가댁 충의당을 중심으로 정무공의 후예들이 80여 호가 생활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방울토마토, 토마토, 딸기를 생산하고 있다. 방울토마토는 2농가에서 2천여 평, 토마토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 딸기는 10여 농가에서 1만여 평을 경작하고 있다. 총 230가구에서 500여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100살의 김분술(노국댁) 할머니로 아직도 집안일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기골이 좋은 편이다.
동제 이 마을은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 아침에 동제를 지낸다. 제관은 마을사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당목 마을 북쪽에 있는 오래된 회나무이다. 일제강점기 때에 회나무 안에 거지들이 살다가 불을 내서 나무가 죽었다가 3년 만에 싹이 나고 되살아났다고 한다.
또 6.25때 미군들이 이곳에서 보초를 서면서 나무에 석유를 뿌리고 불태워 죽었지만 몇 년 만에 또다시 되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은 무성하게 잘 자라고 있고, 영험 있다고 빌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개의 무덤 있어 ‘개무덤’
개무덤 이 마을에는 개무덤과 관련해 다음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여인이 남편을 일찍 사별하고, 남매를 훌륭하게 키우고 죽었다. 염라대왕은 이 여인을 아들 집 개로 환생하게 해주었다. 개가 자라자 아들 최씨가 개를 잡아 먹으려고 했다. 이를 눈치 챈 개가 달아나 버렸다. 최씨는 개를 찾아다니다가 한 스님을 만났는데 개가 어머니가 환생한 것이며 평생을 남매를 키우느라 고생하다가 절 구경도 한 번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구경이나 잘 시켜 드리라는 이야기와 함께 개가 누님 집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누님 집에서 개를 찾은 최씨는 개를 업고 팔도를 두루 돌며 명산대천을 구경시켜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곳에 이르자 개가 발로 땅을 파더니 죽어버렸다. 최씨가 슬피 울며 개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 후 최씨는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천작도(天作棹) 이 마을은 마치 배가 나아가는 형상이라고 하는데, 마침 개무덤 자리에 돛대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마을이 길할 징조라며 이 바위를 매우 신령스럽게 생각했다. 과연 마을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질병이 없었다. 그러나 강동의 양동마을에서는 그곳 못에 이 바위가 비치기만 하면, 흉년이 들고 괴질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양동사람들이 돛대처럼 생긴 바위를 깨뜨렸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이 애통해 하며 마을에 복을 준 바위의 깨진 조각을 모아 무덤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개무덤’이라 하였다. 그리고 무덤 위에 다시 잘 생긴 바위를 돛대처럼 세우고 ‘하늘이 만든 노’라는 뜻의 ‘천작도(天作棹)’라 불렀다.
정무공 3살 때부터 살아
충의당(忠義堂) 이 건물은 병자호란 때 순절한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 3살 때부터 살았던 집이다. 처음엔 흠흠당이라고 했으나 1760년경 건물을 중수하면서 충의당으로 고쳐 불렀다. 앞쪽의 충의당을 중심으로 뒤에 흠흠당과 고방채, 그 뒤에 안채를 배치한 ‘ㅁ’자형 구조이다. 충의당은 정면 4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왼쪽 2칸은 온돌, 오른쪽 2칸은 마루를 배치했다.
정무공은 임진왜란 때 창의해 전공을 세우고 선조 27년(1594)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하고, 권률(權慄) 도원수와 함께 도산(島山)에서 크게 적을 무찔러 선무원종이등공신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69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용인에서 적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음해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인조 18년(1640)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다.
정무공 부조묘(貞武公不祖廟) 경주최씨 정무공파 종가인 충의당(忠義堂)에 있는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의 부조묘이다.
정무공 정려비각(貞武公旌閭碑閣) 정무공 최진립 장군의 정문으로, 인조 18년(1640)에 정려 받아 개무덤 남쪽에 세운 정려비각이다.
종 제사 지내는 상전
남강서당(南岡書堂) 이조 서쪽에 있던 서당으로 남강 최언경(崔彦璥)이 지었다고 한다. 고속도로 서편에 있었는데 관리가 안 되고 노후 되어 20년 전에 헐었다. ‘수족당’이라고도 했다.
충노각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평생을 도우다 병자호란의 용인전투에서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한 충성스러운 노비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의 뜻을 기리고자 장군의 후손들이 2000년에 세운 비각이다. 이 두 노비들은 장군의 사당에서 불천위제향을 받들 때 제상을 물려놓고 옥동과 기별의 신위를 모셔 장군의 후손들이 제배하고 충노의 은공을 기려오고 있다. 종은 제대로 사람대접조차 받지 못하던 터에 종의 제사까지 지내주는 일은 당시의 사회관습으로써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가문은 지금까지도 종의 제사를 지내오고 있고, 최근 비각까지 세우는 인간애를 실천함으로써 명문가다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수족당(睡足堂) 최제익(崔濟翼)이라는 선비가 공부하였다고 하는 남강서당에 있는 서재.
화주배기 이 마을에서 공부하던 경주최씨(慶州崔氏)가 과거에 급제하여 화주(솟대)를 세웠다고 하는 곳으로, 지금의 내남면사무소 부근 삼성생활예술고등학교 자리라고 한다.
활인당(活人堂) 옛날 이곳에 빈민 구제를 위하여 곳간을 지어놓고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활인당이 있었던 곳으로, 이조 동쪽에 있다. 옛날 전염병 환자를 이곳에다 격리·수용하였다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내남의원 자리이다.
“저기 돌이 걸어간다”
선돌 개무덤에 있던 돌을 양동사람들이 와서 깰 때 돌의 일부분이 북쪽으로 뛰어가는데 마을 여자들이 “저기 돌이 걸어간다”고 해서 그 자리에 섰다고 한다. 개무덤 북쪽 논둑에 있다.
도덕골 송단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조천(伊助川) 남쪽의 미역내, 동쪽의 별내, 서쪽의 박달천이 이조에서 합수하여 이조천이 되며, 기린내의 상류를 이루는데 ‘상내(湘川)’거랑이라고도 한다.
마도랑 덕천·부지·이조·용장의 경계를 이루면서 흐르는 내로, 남쪽(마)에서 북쪽으로 흐른다고 ‘마도랑’이라고 했다. 혹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서 말의 물을 먹였다고 한다.
비복(飛伏)테 새각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해 이 골짜기에 날랜 군사들이 매복해 있었다고 한다.
시인 최화국의 생가
비각거리 정무공 정려비각 앞쪽에 있는 들이다.
선돌배기 선돌이 있는 이조 북쪽의 들이다.
샘바대 샘물이 있는 들로, 이조의 서쪽에 있다.
갬디미들 개무덤이 있는 들로 이조 북쪽에 있다.
신얼들 이조 서쪽 곧, 덕천리의 신월 앞에 있는 들.
한웅굴들 이조 북쪽에 있는 들로, 한웅굴샘이 있으므로 한웅굴이라고도 한다.
줄감나무 감나무가 줄지어 서있던 곳으로 충의당 동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감나무가 거의 없다.
한웅굴 이조의 북쪽, 한웅굴들에 있는 커다란 샘.
최화국 생가(崔華國生家) 이조리 531번지 개무덤에 있는 시인 최화국(1915~1997)의 생가. 최화국은 오상순·김소운·이호우·김달진·구상·이윤수 등과 교우하면서 대구시보에서 사회부장 및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미군정과 자유당정권에 비판적인 글을 써 투옥되었고, 이후 도일(渡日)하였다. 일본 시단에서 「H씨상」을 수상했다.
고기가 형산강 거슬러 오를 수 있게
정무공과 같은 불세출의 충신과 12대 400년을 유지해온 최부자라는 세계적인 명문가를 배출한 개무덤은 보기 드문 명당 마을이다. 배가 나아가는 형국이라는 개무덤. 배에 짐이 가득 실리면 떠나가듯 부자가 되면 이 마을을 떠난다고 한다. 교리 최부자가 그랬고, 일본에도 이 마을 출신의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앞으로도 이 마을의 땅기운을 받아 명문가와 부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을은 형산강 상류에 위치한 마을이라 상수원보호구역이고, 경주남산에 인접한 국립공원지역이어서 각종 규제가 많아 다른 마을에 비해 낙후된 마을이라고 한다. 정주권 사업이 이루어져 마을이 좀 개발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또한 형산강 상류에 있는 이곳에 예전에는 고기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각종 어종이 형산강을 거슬러 올라올 수 있도록 고기들이 다닐 수 있는 어로를 확보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최병준(80·경주향교 전교), 최병완(75·전 문교부 총무국장), 최병윤(70·전 국세청장), 최상용(66·고려대 교수), 최영기(52·서라벌대 교수), 최석규(50·서라벌대 교수) 등이 있다.
도움 말씀을 주신 최채량(75·정무공 14세손 충의당 정무공 종가댁 종손)님과 마을을 안내해주신 최병웅 이장, 김경태 새마을지도자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