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면 국당2리(菊堂二里)
국당(菊堂)은 형산강 하류에 위치한 마을로 신룡(神龍)이 된 김부대왕(신라 제56대 경순왕)이 백성들을 어여삐 여겨 꼬리로 산을 잘라 동해로 물길을 냈다는 전설이 얽힌 형산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강동면사무소와 마주보고 있는 이 마을은 동쪽으로 포항 연일과 인접해 있고, 남쪽은 왕신리, 북쪽은 유금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마을형세 국화 같아 ‘국당(菊堂)’
400년 ‘상동계’ 전통 이어오고
옛날 이곳에 신당이 있었고, 후에 국화가 많다고 하여, ‘국당(菊堂)’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이 형산을 중심으로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이 마치 국화처럼 생겨 ‘국당’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이 ‘국당’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 폐합에 의해 장승리(長承里), 상오리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강동면 국당리로 부르면서부터가 아닐까싶다. 이 마을은 본래 조선말 전국 4대 장의 하나로 꼽히고 영남제일의 장이었던 ‘부조장(푸조장)’이 있었던 곳으로 일반에는 ‘부조’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이며 큰 마을인 ‘안마을’도 본래 ‘불당골’로 불렸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부조, 중명을 국당1리, 안마을(불당골)을 국당2리, 범골, 샛마을, 가막골, 황새말을 국당3리로 구획하고 있다.
신라시대 숭불사 있던 ‘불당골’
국당 2리는 국당리의 중심마을로 가장 큰 마을이다.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신라 때 이곳에 숭불사(崇佛寺)라는 큰 절이 있었던 곳이라 ‘불당골(佛堂谷)’이라고 불렀으며, 형산(兄山) 서쪽기슭 안쪽에 마을이 있으므로, ‘안마을’, ‘안말’, ‘내촌(內村)’이라고도 부른다. 나중에 국화가 많다고 ‘국당(菊堂)’이라고 했다고 하지만 이는 행정구역통폐합으로 국당이라 불린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국당2리는 ‘안마을’ 단일부락으로 총 90가구에 주민 180명이 살고 있다. 마을의 30%인 32가구가 안동권씨이다.
벼농사가 주산물이고, 23농가에서 한우 230두를 기르고 있다. 최고령자는 최연이(99 동방골댁) 할머니로 눈이 조금 어둡지만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건강한 편이다. 뭐든지 다 잘 자시고, 식사량은 늘 일정하고 적은 편이다. 술, 담배는 전혀 안 하신다고 한다.
안동권씨 집성촌
안마을 범골 안쪽, 형산 기슭에 있는 마을로 ‘안마을’, ‘안말’, ‘내촌(內村)’이라 부른다. 신라 때 이곳에 숭불사(崇佛寺)라는 큰 절이 있었다 하여 ‘불당곡(佛堂谷)’, ‘불당골’이라고도 불렀으며 후에 국화가 많다고 ‘국당(菊堂)’이라고도 했다.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당목 예전에 수백 년 된 팽나무가 당나무로 모셨으나 1973년경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베었다.
동제 매년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냈으나 당나무가 없어지면서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6문중 상동계 결성
구사재(九思齋)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우고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에 오른 안동인 구사재 권복시(權復始)를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지었다. 본래 구사재는 1638년에 건립한 사당이었으나 1862년에 불타고, 1863년에 구사재정사로 중건, 1894년에 황폐화 된 것을 그 후손들이 1923년에 재건해 강학장소로 활용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에 무너진 걸 1960년에 안마을 현재 자리로 옮겼다.
권공은 전쟁이 끝난 뒤 문란해진 지방풍습을 순화하기 위하여 1598년 뜻있는 선비들과 의논해 ‘상동계’를 조직해 향약(鄕約)을 만들어 민심을 수습했다. 상동계는 안동권씨, 신광진씨, 아산장씨, 오천정씨, 경주최씨, 선산류씨 등 인근의 6문중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동계로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형산 남쪽기슭 불당골에 있는 구사재는 5칸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에 마루를 배치하고, 양쪽에 방을 배치한 구조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곳에 문집과 전통문양의 문짝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7년 전에 도둑이 들어 모두 잃었다고 한다.
구래섬 구라섬들에 있었던 섬으로 ‘구랏슴’이라고도 한다. 말이 풀을 뜯어 먹으면 말 수염에 물이 잡겼다고 해서 ‘구라섬’이라고 했다고 한다.
국당나루터 국당 서북쪽에서 인동으로 건너가던 나루의 터. 지금 양수장 있잣고개 잣골에서 포항시 남구 연일읍 중명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잣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이 고개에 서낭매기가 있었다고 한다.
금산골 안마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근금이라는 광물이 났다고 한다.
용치골 폭포와 웅덩이가 있는 골짜기이다. 사금이 많이 났는데 일본인들이 많이 가져갔다고 한다.
섶밭등 안마을 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섶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잣골 안마을 동쪽 북형산성에 있는 골짜기로 잣나무가 많았으나 일제강점기에 다 베어내고 지금은 없다.
구라섬들 구라섬이 있었으므로 ‘구라평(九羅坪)’, ‘구라섬들’, ‘구랏슴’이라고도 하며, 안마을 서쪽에 있는 들이다.
야생무시 ‘메라리’
방구배기 안마을 북쪽에 있는 논으로 큰 방구(바위)가 박혀 있었다. 지금은 도로를 정비하면서 묻혔다. 옛날에 배가 이 바위에 부딪혀 파손되어 무(무시)씨를 쏟았다고 한다. 이 마을엔 지금도 무시가 난다고 한다. 이 야생무시를 주민들은 ‘메라리’라고 한다.
활대배미 방구배기 동쪽에 있는 논으로, 지형이 마치 활대(긴 작대기)처럼 생겼다.
칠성암(七星岩) 안마을 동쪽에 7개의 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3개가 묻혔다고 한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이 바위에 많이 빌었다고 한다.
탕건바우 안마을 동남쪽에 있는 바위로 모양이 마치 탕건처럼 생겼다. 마을주민들은 ‘범바위’라고도 한다.
평풍바우 마치 평풍(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바위로 안마을 동쪽에 있다.
국당저수지 가막동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왕신저수지를 막고 난 후 없어졌다.
안마을못 일제시대인 1934년에 안마을 동쪽에 자부담으로 막았다는 못이다.
도랑정비 하수구 설치
강동2리 불당골을 찾았을 때 마침 마을회관에서 경로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을 어른들이 모두 마을회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보신탕과 수육, 떡, 과일 등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 마을은 수시로 이렇게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식사대접을 한다고 한다.
한 마을이고 집성촌이다 보니 ‘아잰기요’, ‘아지맨기요’, ‘오야 조카가’, ‘형님인기요’, ‘그래, 동생이가’ 등 한 가족처럼 정겹다.
이 마을은 새마을사업 때 마을주민들이 자신들의 땅을 스스로 기꺼이 희사해 마을길은 일찌감치 잘 냈다고 한다. 마을을 위해서 내 땅을 흔쾌히 내 놓을 수 있는 넉넉함이 400년 상동계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동계의 시효로 향약을 만들어 민심을 수습했던 선조의 후예답게 주민단합이 잘 되고, 정 있게 사는 마을이라는 느낌이 든다.
불당골은 강동면에서 가장 좋은 경로당을 자랑한다. 위치와 경관이 좋고, 아름다운 조경으로 잘 가꾸어져 있다. 그런데 이 마을 주민들에게 큰 걱정이 있었다. 형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로 바로 내려와 물난리를 자주 겪는다고 한다. 마을 뒤 산기슭에 물길을 만들어 물난리를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또 마을 앞을 흐르는 도랑의 정비를 바랐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권택진(72·전 성균관대 공대학장), 권택룡(70·전 경북대 교수), 권혁석(47·충주대 교수), 권성환(35·외무고시 미국 대사관근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