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북면 봉길리(奉吉里)
봉길은 죽어서도 호국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큰 원을 세운 신라 문무대왕수중릉이 있는 마을이다. 푸르고 맑은 동해의 청정해역을 끼고 있는 봉길은 신비로운 문무대왕수중릉을 비롯한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해안경관과 넓은 해변의 봉길해수욕장 등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월성원전이 들어서면서 마을의 상당부분이 잠식되었고, 최근 신월성 1,2호기 추가건설로 본동에 해당하는 ‘웃봉길’과 ‘아랫봉길’은 아예 원전부지에 편입되고 주민들 대부분이 이주한 상태다. 따라서 현재 봉길은 마을 대부분을 원전에 내주고 문무대왕릉 인근 해변의 ‘무젓’을 중심으로 ‘덕실’과 ‘큰골’에만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세계유일의 문무대왕수중릉
봉황이 알 품은 ‘봉길(鳳吉)’→‘봉길(奉吉)’
원전지구에 편입된 봉길마을은 현재 공유수면 매립공사가 한창이었다. 수억년 동안 바닷물이 드나들며 조각해 놓았던 해안의 갖가지 바위와 꼬불꼬불 펼쳐졌던 아름다운 해안과 푸른바다는 이미 콘크리트에 묻혀버린 상태였다. 이곳에 방폐장까지 들어설 계획이니 바닷가 해안에 자리하고 있었던 ‘봉길’의 옛 모습은 이제 영영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봉길은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은 형국이라 ‘봉길(鳳吉)’이라 했으나, 지금은 ‘봉길(奉吉)’로 표기하고 있다. 아마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무젓(수제)’·‘아랫봉길(하봉)’· ‘덕실’·‘큰골’이 봉길1리, ‘웃봉길(상봉)’이 봉길2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봉길(상봉, 하봉)은 마을 대부분이 이주한 상태, 보상 문제로 일부만 남아 있다.
아름다운 해안 콘크리트에 묻혀
봉길은 농업과 어업이 어우러진 마을로 농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약 30%이고, 어업 및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70%에 이른다. 횟집이 15가구이며 미역과 전복 등 해산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원전이 들어선 이후 점점 감소하여 옛날의 해산물 수확이 현격히 줄었다고 한다.
봉길1리는 174세대로 총 397명의 주민이 생활하고 있다. 남자 197명, 여자 200명이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96살의 김연례(대남댁) 할머니로 눈과 귀가 총명하고, 음식도 잘 자신다. 23년간 할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신희숙(53 막내며느리)님에 따르면 “아직 편찮은 데는 없고, 밥도 잘 자신다. 식사는 주로 채식으로 적게 자시고, 술은 하시지 않고, 담배는 태우신다.”고 했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봉길은 경주최씨들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50가구 이상 살고 있다.
무속인 줄 잇는 대명지
당목 무젓에 있는 소나무로 수령이 약 300여년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나무가 3줄기 자라고 있었는데 원줄기는 말라 죽은 상태이고, 그 옆 가지가 살아있다. 많은 무속인들이 이곳에 찾아 연일 기도하고 술 등을 부어 나무가 죽었다고 한다. 취재 당시에도 한 무속인이 이곳에 불을 피우고 기도하고 있었다. 나무가 죽은 데에는 나무주변을 온통 시멘트로 발라 놓은 영향도 있어 보인다.
당나무 아래에는 작은 샘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가뭄에는 온 마을 주민들이 이 물로 살았다고 한다.
동제 10년 전까지는 동제를 지냈으나 제관을 구하기가 어려워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동제를 지낼 계획이라고 했다.
마을 땅 대부분 원전에 편입
웃봉길 마을이 마치 봉황이 알을 품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봉길(鳳吉)’이라고 부르다가, ‘봉길(奉吉)’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으므로 ‘웃봉길’, ‘상봉길(上奉吉)’, ‘상봉(上奉)’이라고 부른다. 월성원전에 의해 마을이 헐리고 이주했다. 현재 보상 문제로 20여 가구가 남아있으나 조만간 모두 이주할 것이다.
아랫봉길 마을이 웃봉길의 아래쪽 산중턱 아래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하봉길(下奉吉)’, ‘하봉(下奉)’이라고 불린다. 이 마을도 웃봉길처럼 월성원전에 편입되었다. 보상 문제 협의로 20가구가 남아있다.
무젓(수제 水祭) 무제를 지내던 무제당이 있다고 하여 ‘무제’, ‘무저테’라고도 하며, 봉길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가뭄이 심하면 경주 부윤이 와서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무제를 지냈다고 한다. 문무대왕수중릉과 봉길해수욕장이 있는 마을이다. (70세대)
큰골 무젓 위쪽에 10여 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월성원전으로 인해 웃봉길 사람들이 이주해서 이룬 마을이다. (20가구)
덕실 대종천 하구에 근래 새로 생긴 마을이다. 이곳은 주로 원전으로 인해 아랫봉길 사람들이 이주해서 이룬 마을이다. (15가구)
호국룡 되어 왜구 막겠다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으로 봉길리 앞바다 약 150m 거리의 대왕암에 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죽어서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는 유언에 따라, 이곳에 수장했다. 대왕암을 동서·남북으로 깎아 십자로 수로를 만들고, 4평가량의 석함을 만들어 옥석을 덮고, 화장한 뼈를 담아 수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능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마을주민들에 의하면 수중릉이 있는 부분에는 해초가 없고 물이 항상 깨끗해 신비하다고 한다. 1967년 7월 24일 사적 제158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둘레 약 200m의 바위섬이다. 이 바위를 마을주민들은 ‘댕바우’라고 불러오고 있었다.
이곳이 문무대왕수중릉이라고 밝혀진 것은 1960년대의 일로 그 후부터 ‘대왕바우’라고 부른다. 댕바우는 대왕바우가 변해서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때부터 이곳에 대왕이 계시니 대왕바우라고 불러 온 것이다. 이 처럼 마을과 땅, 산, 골짜기, 바위에 붙은 옛 이름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바위는 6.25때 이 마을 청년들의 피난처로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념대립으로 인해 밤낮으로 청년들이 시달릴 때 배를 타고 이곳에 피신하여 몇 달을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봉강정(鳳岡亭) 경주인 최진영(崔震英)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지은 정자(亭子)로 무듬산 밑에 있었으나 마을이 이주하면서 3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대부분 바위 매립으로 훼손
광어돌 광어가 많이 났다고 하는 곳으로 옛날 이 바위 위에서 광어를 낚았다고 한다. ‘과듬’이라고도 불렀다. 형제바우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넙덕바우 보둑돌 남쪽에 있는 넓적한 바위이다.
노정암 대왕암 우측 약 400m 지점에 있는 물속 바위로 주민들은 ‘무듬’이라 부른다. 각 20평 크기의 4개 바위가 무듬이를 이루고 있다. 미역·전복·해삼·홍합·우렁쉥이 등이 많이 났다고 한다.
농바우 농처럼 생긴 바위로 똑바우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똑바우 형제바위에서 남쪽으로 보리두들까지의 바위들을 통칭해서 말한다.
마당돌 넙덕바우 남쪽에 있는 바위로 바다에 나가서 사람이 설수 있는 마당처럼 넓은 돌이다. 수면에서 1m 정도 된다고 한다. 아랫봉길에 있는데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보둑돌 광어돌 남쪽에 있는 바위로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 매립되고 없다.
송곳돌 송아지돌 옆에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긴 바위이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 매립되고 없다.
송아지돌 쉰개돌과 넙덕바위 사이에 있는 바위이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 매립되고 없다.
쉰개돌 50개의 돌이 있다고 하여 ‘쉰개돌’이라고 했다. 미역이 많이 나고 넙덕바우 남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원전건설로 매립되고 없다.
요강돌 모양이 마치 요강처럼 생긴 바위로 대왕암 앞에 있다.
장성바우 위쪽에 장성(장승)이 있었다고 하는 바위로, 봉길 동북쪽 바다에 있다. 장성암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형제바우 바다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형제처럼 나란히 있다고 하여 ‘형제바우’라고 한다. 노정암 우측 100m 지점에 있는 무듬이로, 각 5평정도 크기이다. 이곳에 미역·전복·해삼 등이 많았다고 한다.
해산물 급격히 감소
무듬산 무덤이 많은 산으로 웃봉길 뒤에 있다. ‘토월산(吐月山)’이라고도 한다.
뒷재 웃봉길 뒤에서 양남면 나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마을뒤에 있다고 붙인 이름이다.
엉기밋재 웃봉길 동북쪽에서 무젓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오도골재 오도골 위에 있는 고개이다.
월봉재 웃봉길의 다랑골 위에 있는 고개로 정낭고개 동쪽에 있다.
정낭고개 변소가 있었다고 하는 고개로 웃봉길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감남의골 웃봉길 서남쪽에 감나무가 있는 골짜기로 ‘남의골’이라고도 한다.
다랑골 동뭇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월랑곡’이라고도 한다. 원전 추가건설로 인해 31번 국도 우회도로가 새로 난 골짜기이다.
당숫골 당수나무가 있었던 골짜기로, 복숭나무골 서쪽에 있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덤방골 둠벙(웅덩이)이 있었던 골짜기로, 배나무골 남쪽에 있다. ‘등방골’이라고도 한다. 아랫봉길에 있다.
도지기 도적이 숨어 있었다고 하는 깊은 골짜기로, 당숫골 북쪽에 있다. 아랫봉길 도투막골 안골짜기를 말한다.
도투막골 지형이 도투마리(배틀 도구)처럼 생긴 골짜기로, 아랫봉길 덤방골 남쪽에 있다.
동뭇골 웃봉길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웃봉길에서 아랫봉길로 내려오는 골짜기이다.
동골 지형이 마치 물동이처럼 생긴 골짜기로 웃봉길 서쪽에 있다.
배나무골 돌배나무가 있던 골짜기로 남의골 남쪽에 있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범골 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범이 살았다고 한다.
복숭나무골 봉숭아나무가 있던 골짜기로 심산골 서쪽에 있다.
성짓골 웃봉길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오도골 봉길 서남쪽에서 무젓으로 넘어가는 고개.
오두막골 동웃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웅굴안골 우물 안쪽에 있는 골짜기로, 봉길 남쪽에 있다.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적은골 웃봉길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짐상골 뒷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침상곡(針箱谷)’이라고도 한다.
큰골 웃봉길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이다.
건넷밭 뒷들 남쪽 내 건너에 있는 들인데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뒷들 봉길 뒤에 있는 들인데 지금은 원전에 들어가고 없다.
봇들 수제 서북쪽에 있는 들인데 지금의 아랫덕실을 말한다.
원전매립공사로 모래유실
대종천 하구인 덕실마을에 방제둑이 없어 비가 많이 오면 늘 범람한다. 또한 길이 위험해 사고가 자주 난다. 주민들은 방제둑과 하천복개공사를 하여 이를 해소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원전의 매립공사와 대본방파제 영향으로 물길에 변화가 와서 해변의 모래가 유실되고 좁아져 피서객이 줄고 있어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특히 바다에 해산물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40년간 해녀로 일했다는 최화출(57·해녀)씨는 “이곳에 미역, 전복 등 해산물이 많이 났는데 요즘은 30%도 안 된다. 물속에 들어가 보면 특히 원전 온배수 나오는 곳에 가면 40~50℃되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데 일대의 고기가 다 죽는다. 숭어의 경우 더운물을 좋아해 모이는데 고기에 산호가 끼어 먹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바닷가 주민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이다. 원전으로 인한 방사능 피해뿐만 아니라 바다매립으로 인한 지형변화에 대한 환경영향과 온배수, 침출수 등으로 인한 환경오염문제도 제대로 짚어 봐야할 것 같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유식(48·경주박물관 학예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