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옷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 중간쯤
배회하던 바람이 고요를 흔든다
상여처럼 엎드린 한 통의 고즈넉함
들척지근한 땀 냄새, 곰팡내
저승꽃처럼 피우는 버려진 일생들의 두런거림
트로트 메들리로 흘러나오고 있다
가는 곳마다 군말 없이 따라다녔지
함께 허리 줄이고 어깨 늘어뜨렸지
한 때는 멍든 세종대왕도 수없이 알현했고
등받이 긴 의자에 앉아 거드름도 피웠지
주인이 찾지 않을 때는 십장생 속에서
점잖게 휴식이나 취했다
마냥 웅크릴 수만은 없겠지만
남루도 이제는 새 옷처럼 빛나니
닳은 소매 내밀지 않는 편이
허물로 남은 목숨 마무리하기 조금은 쉬우리라
뚜껑 열리고 바람 잠시 묵념하는 순간
입관식 간단하게 또 하나 끝났다
눈 한번 끔벅이니
한 생이 또 스쳐갔는가
헌 옷 수거함에는
헌 옷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몸담았던 비누거품보다
가벼운 마음들 각질의 세월 견디고 있다
양수처럼 흐르는 네모난 어둠 속에서 누리는
한 떼의 잊혀짐의 평화
수없이 간직했던 지폐보다 더
짙은 푸른 전설이 출렁인다.
한 때 양털이었던 실오라기들
초원으로 돌아가는 꿈에
헌 옷 수거함은 젖어가리라.
시작노트
버려지는 옷들을 보니 쓸쓸하였다. 어느날 갑자기 버림받기 전까지, 몸을 한껏 피워주었을 그들의 삶은 갸륵하다. 그들을 있던 자리로 되돌려 보내고 싶었다. 어찌 헌 옷들만 버려지겠는가?
약 력
1967년 경북 청도 출생
200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경주시 강동면에 살고 있음.
현재 고등학교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