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 꽃다운 화랑들이 수련하던 ‘방내(芳內)’ 방처럼 산들에 둘러싸여 ‘방내(房內)’ 건천읍 방내리(芳內里) 단석산은 신라 때 김유신을 비롯한 꽃다운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기르며 수련하던 주요 수련장이었다. 방내는 단석산 동쪽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화랑들이 이 마을을 통해 단석산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따라서 마을이름을 ‘꽃안’, ‘방내(芳內)’라고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또 꽃이 많아 ‘방내(芳內)’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단석산 준령이 동쪽으로 흘러내리면서 빚어낸 산자락이 마을을 마치 방처럼 안온하게 둘러싸고 있어 ‘방내(房內)’라고 했다고도 전한다. 방내는 모량리 안쪽에 자리한 마을로 남쪽은 단석산을 사이에 두고 내남 비지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쪽은 송선리, 북쪽은 조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방내는 ‘큰마을’, ‘고양테’, ‘모시밭각단’, ‘말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마을은 다시 마을길을 중심으로 위쪽(서쪽)은 ‘중부’그 아래쪽(동쪽)은 ‘하부’라고 부른다. 건천양송이의 주산지 방내는 단석산의 깊은 골짜기(큰골)를 차지하고 있어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고 마을 동편에는 비교적 넓은 들을 보유하고 있어 살기 좋은 마을이다. 버섯재배로 유명하며 양송이의 경우 전국 최대생산량을 자랑하는 건천양송이의 60%가 방내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버섯마을로 불릴만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입산도 늘어나고, 새송이 등 대체 버섯들의 생산이 늘어나는 바람에 수익률이 떨어져 생산농가가 줄고 생산량도 절반수준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방내는 200여 가구에 주민수가 1천여명에 이르는 큰 마을이다. 벼농사와 버섯, 사과, 포도, 버찌 등을 생산하고 있다. 버섯은 50가구에서 100여동(1동 100평)을 경작하고 있다. 한창 때는 90농가에서 200여동을 했다고 한다. 사과 1만5천 평, 포도 2만여 평, 버찌 3천여 평을 경작하고 있다. 버찌의 경우 나무가 고사되고 병 때문에 잘 안된다고 한다. 옛날에는 월성김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많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고른 성씨분포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절 구경에 짚신 다 닳아 큰마을 방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큰마을’ 혹은 ‘중리(中里)’, ‘중마을’ 이라고 부른다. (53 가구) 하부(下部) 큰 마을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49 가구) 고양테 단석산 아래 큰골어귀에 있는 마을로 신라시대 불교가 융성할 때 절이 많았던 곳이라 부처님께 공양을 바치던 곳이라는 뜻으로 ‘공양(供養)터’라고 하던 게 ‘고양터’, ‘고양테’로 불린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절 구경을 다하고 나면 짚신이 다 닳아 질 정도로 절이 많았다고 한다. 현재도 이 골짜기에는 천주암과 용화사 금선사 등 3개의 절이 있다. 이 마을을 가로질러 고속철도가 건설됐다. (30 가구) 두암(말암 馬岩)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할 때, 이곳은 말을 매어두고 쉬었던 곳이었다고 한다. 당시 말을 매어 두던 바위를 따서 ‘말암’, ‘말바우’ 혹은 ‘두암(斗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들은 있지만 특별히 말을 매었다고 할만한 바위는 없다고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 서쪽이다. (30 가구) 모시밭각단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모시를 많이 재배해 ‘모시밭각단’ 이라고 했으며, ‘저마전(苧痲田)’ 이라고도 불렀다 한다. (30 가구) 동제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날 동제를 지낸다. 하부 마을의 솔밭에 당집이 있는데 본래 있던 골기와 건물이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5년 전에 슬라브건물로 새로 지었다. 제관 구하기가 어려워 지금은 마을 노인회장이 당연직으로 제관이 된다고 한다. 당목 본래 당나무는 당집 동쪽의 괴화나무로 나무를 해치면 마을에 재앙이 온다고 전한다. 지금은 말라 죽은 채 서 있다. 따라서 그 인근에 있는 수령 200년 정도의 팽나무(포구나무)로 당나무를 정했다. 원효대사 신통력으로 ‘달래산’ 단석산(斷石山) 방내 뒷산으로 건천과 산내, 내남에 걸쳐 있는 해발 827m의 산이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 산에서 수련할 때 칼로 바위를 잘랐다고 해서 ‘단석산’이라고 한다. 원효대사가 스님 천명의 목숨을 구해’달래산’,’월생산(月生山)’이라고도 한다. 댕미산 큰골 동남쪽 못밑에 있는 산으로, 댕기처럼 생겼다 하여 ‘댕기산’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이 산이 움직여 내려오는 것을 보고 빨래하던 아낙이 “산이 내려온다!”고 소리를 치자 지금의 자리에 멈추어 섰다고 한다. 일제가 침략하여 이 산의 혈을 자르자 붉은 피가 쏟아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발산 지형이 기(게)의 발처럼 생긴 산으로, 나발등의 북쪽에 있다. 돌배기산 산등성이에 큰 바위가 박혀있는 모시밭각단 서쪽에 있는 산이다. 두암산(頭岩山) 방내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댕미산이 움직이자 함께 꿈틀거리며 내려왔었다고 한다. 방내가 두암산은 좌청룡, 댕미산은 우백호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밥부젯산 지형이 밥보자기를 덮어 높은 듯한 모양의 산으로 천주암 서북쪽에 있다. 말암산 말바우가 있는 높이 420m의 산으로, 모시밭각단 서쪽에 있다. 400기 고분 10여 기밖에 안 남아 방내리 고분군(芳內里古墳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크고 작은 돌방무덤(石室圓形)들로 원래 400여 기(基)가 산재해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대부분 도굴당하고, 1969년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60여기를 발굴했으며 지금은 10여 기가 남아있다고 한다. 나발등 지형이 마치 나발(나팔)처럼 생긴 능성이로 상부 동네 뒷산이다. 지금은 고속철 공사로 발굴 중에 있다. 능매기 왕릉이라 일컬어지는 큰 묘가 있는 골짜기로, 말암 서쪽에 있다. 현재 고속철로 인해 발굴하고 있다. 대밭등 대밭이 있었다고 하는 등성이로, 큰골 방내못 왼쪽에 있다. 줄밋등 무덤이 줄을 지어 있는 등성이로, 말암산 서쪽에 있다. 경주에서는 묘를 ‘미’, ‘밋등’이라고 했다. 숙기등 지형이 개의 숫컷같이 생긴 등성이로 능매기 서쪽에 있다. 마당재 방내리 남동쪽에서 내남면 비지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위가 편편하게 넓어 ‘마당재’라고 한다. 비지고개라고도 한다. 도싯골 도솔암이 있던 골짜기로, 미영골의 서쪽. 방내저수지 상류 오른쪽 골짜기이다. 돈구딩이 나무하러 오가던 목동들이 지게를 받쳐 놓고 돈치기를 하며 놀던 골짜기로, 단석산 오르는 길 오른쪽에 있다. 딸밭미기 딸기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로 큰골 안쪽에 있다. 만물내기 단석산 여러 골에서 많은 물이 모여 드는 곳으로 고양테 남쪽에 있다. 말암고개 방내에서 조전리 박실로 넘어가는 고개로 ‘말음고개’, ‘박실고개’라고도 하며 말암산에 있다. 머그남밭골 머귀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로, 부딧골 서쪽에 있다. 밍골 큰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밥골 옛날 흉년에 어느 농부가 배가 고파 자기의 논과 밥 한 그릇을 맞바꾸어 먹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논이 있는 들, 방내 동쪽 새모지 밑에 있다. 소 북디를 다시 매야 북딧골 옛날에 나무하고 내려오다가 평지라 쉬면서 북디(소의 질매를 고정시키는 끈)를 다시 느슨하게 맨다고 ‘북디골’이라고 한다. 백릿골의 서쪽에 있다. 얼음밧골 방내저수지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얼음바우가 있는 골짜기이다. 점골 옛날 옹기를 굽고 옹기점이 있었던 골짜기로, 말암 서쪽에 있다. 조오통골 이곳에서 종이를 떴다고 하며 맷돌바우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중삿골 죽은 중을 화장한 골짜기라 하며 대밭등 남쪽에 있다. 큰골 말암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화장골 화장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골짜기로, 말바웃골 서쪽에 있다. 칠미기 칡이 많았던 골짜기로, 중삿골 남쪽에 있다. 지금도 칡이 많다고 한다. 자하골 모량과 방내에 걸쳐 있는 골짜기로 ‘잣골’, ‘자골’ 혹은 ‘자아골’이라고도 한다. 수호림(아랫솔밭) 방내의 하부 마을 어귀에는 수백 년 된 나무가 일렬로 숲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당집이 있다. 이 숲은 인공으로 조성한 일종의 방어림으로 지금까지 400m 정도가 남아있다. 옛날 방내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아야 천기(天氣)가 지켜진다 하여, 명당을 수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위솔밭 모시밭각단의 북쪽을 막아주는 인공으로 조성한 소나무 보호림. 버스종점에 있다. 약물탕 피부병에 잘 듣는 약물이 나던 골짜기로, 산제바우 서쪽에 있다. 이 물을 맞거나 마시면 갖가지 피부병이 다 났고 물을 떠다가 한 달을 두어도 이끼가 끼거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천주암 주차장까지 호수를 연결해 수도꼭지를 설치해 놓았다. 지금도 마을주민 대부분이 이 물을 먹는다고 한다. 욕심으로 망한 장흥사 장흥사(長興寺) 터 방내마을 안 골짜기인 큰골에는 큰 절인 장흥사가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장흥사는 매우 큰 절이라 방문객이 많았는데, 욕심 많은 주지가 과객들이 찾아와 양식을 축내는 게 싫어 한 도승에게 과객 쫓을 방도를 물어 절의 왼쪽 등성이인 나태고개의 혈을 끊었다. 그랬더니 과연 과객의 발걸음이 끊어졌으나 신도들의 발걸음도 끊어져 절이 망했다고 한다. 지금은 방내저수지에 수몰된 장흥사터에서 ‘월생산 장흥사(月生山 長興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이 장흥사임이 밝혀졌다. 단석사(斷石寺) 터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가 머물러 공부했다는 단석사가 있었던 터로 큰골에 있다. 현재도 돌 축대가 남아있다. 단석산 동쪽 8부 능선에 있다. 백련암(白蓮庵)터 백릿골에 있는 백련암(白蓮庵)의 터. 고단사 남쪽에 있는 산에 있다. 화장암(花藏庵) 터 단석산 화장골에 있었다고 하는 암자인 화장암의 터이다. 척반암 단석산 정상에서 천탑바위를 지나 조금 더 내려오면 거대한 바위를 만나는데 이것이 척반암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때 원효스님이 단석산에 들어와 동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 바위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 앉아 삼매에 들었는데, 중국 종남산 운제사가 산사태로 천명의 스님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급한 대로 옆에 있던 소반을 던졌다. 이것이 중국으로 날아가 운제사 상공에서 소리를 내며 달처럼 떠 있자 법당에 있던 스님들이 다 나와 구경하는 사이 산이 무너져 법당을 덮쳤으나 천명의 스님들은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불이 날것을 미리 알고 달월(月)자을 써서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천명의 제자를 괴롭히는 요승을 혼내주기 위해 지팡이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어쨌거나 목숨을 구한 천명의 스님들이 원효에 대한 고마움을 갚기 위해 각자 돌 하나씩을 들고 와 이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천탑바위’이다. 중국에서 돌 들고 와 탑 쌓아 천탑바우 천 개의 돌을 모아 세운 탑이 변하여 된 바위라 하며, 단석산 하늘받친바우 서쪽에 있다. ‘천탑암(千塔岩)’이라고도 한다. 하늘받친바우 높이가 약 15m 정도 되는 바위로, 고단사 절터 뒷봉우리 정상부에 있다. 불썬바우 매우 영검하여 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려 소원을 빌었다고 하는 바위. 천주암과 약물탕 사이 골짜기 위쪽에 있다. 날이 가물면 이곳에서 무제를 지내는데 3일내로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눈등바우 눈두덩처럼 생긴 바위로 방내 서쪽에 있다. 탱바우 앉아있는 미륵보살을 선각으로 조각했다. 불상이 있다고 탱바우라고한다. 넙덕바우 큰골 못에서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계곡이 갈라지기 직전 지점의 등산로 옆에 장정 열명정도는 올라앉을 수 있는 큰 바위이다. 신라시대에 수련하던 화랑들의 면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화랑바위’라고도 한다. 배바우 모양이 배처럼 생긴 바위로 수리바우 남쪽에 있다. 단석산 정상 아래가 된다. 얼음바우 초봄까지 얼음이 녹지 않는 바위로 방내저수지 서쪽에 있다. 맷돌바우 모양이 맷돌처럼 생긴 바위로, 칠미기 남쪽에 있다. 소똥바우 소똥(쇠똥)처럼 생긴 바위로, 불선바우 서남쪽에 있다. 수리바우 수리가 집을 짓고 살았다는 바위로 소똥바우 서남쪽에 있다. 방내저수지 큰골에 있는 못으로 1960년대에 막았다고 한다. 장흥사터가 이 못에 수몰됐다. 장심저수지 공양테 동쪽에 있는 못으로 ‘장시못’, ‘장승못’, ‘ 장천재’, ‘장생제(長牲堤)’라고도 한다. 새못 장심저수지의 동쪽에 일제 때 새로 만든 못이다. 장시밋거랑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새어나온다고 ‘장새미’라고도 한다. 방내 남쪽 단석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북쪽 금척으로 흐르는데 ‘장천천(長泉川)’이라고도 한다. 못밑 장심 저수지 밑에 있는 들이다. 솔징이번답 나발자리 남쪽에 있는 논으로 소나무정자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용매기 말암 남쪽에 있는 들. 큰골들 큰골에 있는 들. 버섯도 예전 같지 않아 방내는 큰골에 못을 막기 전에는 가뭄으로 인해 3년에 한번은 수확을 못할 정도로 한해가 심했다고 한다. 1960년대에 저수지를 막고 나서 가뭄피해는 줄었지만 마을이 그나마 풍족해진 것은 불과 20~30년 전부터의 일로 버섯재배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제 수입농산물이 늘어나고, 대체버섯의 개발 등으로 5~6년 전부터는 버섯농사마저도 시원치 않다고 한다. 예전에 한창때에 비하면 30%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농로 포장공사와 마을안길 하수도 설치를 바라고 있었다. 하수도 시설 미비로 비가 오면 배수가 원활하지 않아 농경지 침수피해가 발생하고, 농로 미 포장으로 농기계의 통행에 어려움이 크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올해 94살의 정용근(안호어른)할아버지로 6개월 전부터 거동이 어렵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용이(67·예비역 육군중령), 김규식(59·포항 부시장), 김종대(56·대덕연구단지), 최홍규(55·교수), 이성희(53·경기도 교육청), 정용학(33·세무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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