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에 그만 화들짝 놀란 산수유가 샛 노란색 옷으로 온 산천을 분탕질해 놓았다. 언덕 위 밭둑에는 홍매화가 꽃망울 터뜨리고, 마알간 아기 눈망울 같이 이슬을 잔뜩 머금고 있다. 아름답다.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봄 꽃 향연이 본격적으로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했다. 곧 이어 만개할 개나리와 진달래가 출정 준비를 마치고, 몸단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동일 위도에서 개나리와 진달래는 고도가 100m 높아짐에 따라 평균 이틀 정도 늦게 개화하며, 하루에 약 30㎞ 북상한다고 한다.   함양을 걸어 다닌 지가 벌써 여러 날이다. 서상면 논개 묘역을 나와서 다시 대전 충무 간 고속도로에 몸을 실었다. 차창으로 비치는 이곳 함양은 정말 左 안동 右 함양이랄 만하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정자는 길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지세에 나고 자란 함양의 인물들은 대개 지조가 곧고, 그 뜻이 높아 현재에도 추앙을 받고 있는 이가 많다. 아마도 고운 최치원의 학맥이 아직도 이곳 함양에서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함양 나들목을 나와서 조선조 5현(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으로 유명한 일두 정여창(鄭汝昌:1450~1504) 선생의 고택이 있는 지곡면 개평리에 들렀다.  하동 정씨 집성촌으로 아직도 백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개평리는 경주의 양동마을을 옮겨 놓은 듯 고고한 선비의 향내가 온 마을을 감싸 안고 있다.   일두 선생은 흔히 김광필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핵심인 이기론의 비조로 꼽고 있다. 또한 일두 선생은 책상머리에만 머물지 않고, 실천 철학자로 도학사상을 왕도정치로 실천하려고도 했다. 그 결과 이곳 안음(안의) 현감시절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여,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주력하였고, 아울러 새로운 통치철학을 완성하려고 했다고 판단된다. 비록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뒤이어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지만, 우리나라 성리학의 거두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후일 중종 12년(1517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우의정에 증직됐고, 선조 8년(1575년)에 문헌공으로 시호를 받기에 이른다. 한 가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두의 저서는 무오사화 때 모두 소각되어, 현재는 후손들이 편찬한 <문헌공실기>에 몇 편의 글과 시문이 전해져 온다는 것이다. 한 나라 군주의 잘못된 통치가 이처럼 엄청난 지식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은 작금의 나라 사정과 너무나 닮아 있어 두고두고 새겨 둘 일이다.   현대 지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는 조지훈 역시 한양조씨 정암 조광조의 후손이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문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을 때, 그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지조를 지킨 것은 경북 영양군 일원면 호은종택의 정기가 아직도 살아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회재 이언적 선생은 어떠한가. 안강 세심마을의 독락당과 양동마을은 안온하면서도 지조있는 사람들을 배출할 충분한 입지조건을 갖췄다고 하는데 딴죽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 북한 사학계의 ‘신라 삼국통일 부정설’을 남한의 사학계도 일부 동조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 마다 기자는 반문하고 싶다. 그러면 누가 삼국을 통일했단 말인가. 물론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복원도 중요한 우리의 몫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모든 역사를 부정하면서 새판을 짤 필요가 어디에 당위성이 있단 말인가. 애통 할 따름이다.     함양은 지금 오랜 세월동안 닫혀져 있던 빗장을 풀기 시작했다. 교통의 사통팔달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리란 기대가 함양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지조와 기개가 닮았고, 함께 향유할 역사적 인물들을 공유하고 있는 함양과 경주는 앞으로 지자체간 활발한 교류를 기대하는 것이 기자의 욕심일까.   삼국을 통일한 화랑들의 정신이 고려 조선조까지 이어져, 조선후기 실학의 거두 연암 박지원 역시 이곳 안의(안음) 현감으로 있을 때 물레방아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연암은 ‘과농소초’를 지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실천 했고, 많은 한문 단편을 지어서 양반사회의 무능함을 통쾌하게 질타하고 있다. 안의 현감시절 지은 단편 중 ‘함양열녀박씨전’은 열녀 만들기에 열중하는 조선조 양반사회의 부도덕함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다.   함양을 기행하면서 부정을 하든 말든, 화랑정신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그날 울려 퍼졌을 화랑들의 함성이 기자의 귓전을 아직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화랑도정신은 오랜 핍박을 받았지만, 이곳 함양에서 고운의 채취가 정여창과 논개의 충절을 낳았고, 연암의 실학정신으로 승화되어, 오늘도 우리네 가슴 저 밑바닥을 채워주는 생명수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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