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를 맞으면서 황룡사지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수 많은 불상과 불탑이 산재한 노천박물관이라 불리우는 이 서라벌 땅과 가장 유사한 불교문화유산을 간직한 곳이 바로 현재 파키스탄의 스왓계곡이라고 할 수가 있다. 스왓의 대표적 승원인 붓카라스투파는 3곳이 있었는데, 제2스투파터는 흔적이 소멸되어 제1스투파와 제3스투파터만 남아 있어서 제3스투파터를 편의상 붓카라 제2스투파라고도 한다.   붓카라 제2스투파터는 황토흙으로 이루어진 언덕에 토굴을 파고 돌로 쌓아 만든 석굴인지 토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굴에다가 하나의 굴에 한 불탑을 모시고 어떤 굴엔 불탑이 없는 곳도 있어서 처음엔 스님이 생활하는 비하라굴이었는데 나중에 불탑을 모신 차이타굴로 바뀐 곳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하고, 마당엔 몇 개의 불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불탑의 기단부엔 신라불탑처럼 우주와 탱주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런데 붓카라 제2스투파터를 답사하면서 난 황룡사터를 떠 올렸고, 오늘 다시 가랑비 속에 황룡사지 장육존상 터에서 파키스탄 스왓의 붓카라 제2스투파터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다 이 글을 적어 본다.   박물관대학에서 배운 기본 상식 중에 우리나라 사찰터는 1탑 3금당, 3탑3금당, 1탑 1금당, 2탑 1금당(쌍탑가람)으로 분류되고 시대에 따라 그 양식이 변천해온 것이며 황룡사터는 1탑 3금당이라고 배웠었다. 그런데 두 차례의 인도답사와 이번 파키스탄 간다라문화 답사를 통해 우리의 상식인 “O탑O금당”하는 분류는 무용지물의 상식임을 알았다.   보통 불상(금인)을 모신 건물을 금당이라 하고 불상을 모시지 않고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은 강당이라고 부르지만, 불교 및 불탑 불상의 발생지인 인도나 파키스탄에는 이런 ‘O탑O금당’하는 양식부류가 통하질 않는다.   우리의 금당에 비유되는 인도문명지역의 차이타석굴에는 주로 불탑을 모시고 불상이 또 함께 조각되거나 모셔지지만, 중국이나 한국, 일본의 불교문화에서는 불상을 건물안에 모시지 불탑을 건물안에 모신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인도불교에선 예배의 대상으로 불탑이 먼저 만들어졌고 수 백년 뒤에 불상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일본 불교에선 불상이 먼저 전래되고 나중에 불탑이 조성된 불교 발전과정의 차이와 부처님 진신사리의 유무에 따른 불탑과 불상에 대한 숭배의 정도차이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탑 3금당, 1탑1금당 따위는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이 일본의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의 사찰을 연구하다 만들어낸 분류방식일 따름이다. 그리고 오늘 가랑비 속에서 황룡사 금당터와 9층목탑터 그리고 동·서 금당을 수차례 오가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그 무엇에 놀라 목탑터에서 중금당과 동·서 금당의 높이를 비교해보니 황룡사는 1탑3금당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꼭 옳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중금당 장육존상 주춧돌과 9층목탑터 주축돌의 높이는 비슷했지만, 중금당에 비해 동·서 금당터는 규모도 작을뿐더러 높이가 매우 낮았다. 단순히 중금당과 나란히 배치된 건물터라고 해서 무조건 불상이나 탱화를 모신 금당터라고 추정하여 1탑 3금당배치 라고 끼워맞춤식 설명이 아닌가 싶다. 만약에 동·서 금당이 중금당과 동시에 만들어지고 불상을 모셨다면 최소한 불상을 모신 대좌 주춧돌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거늘 없다. 만일에 동·서 금당터에 불상이 없었다거나, 중금당과는 격이 다르게 나중에 만들어진 건물터라면 1탑3금당이라는 상식은 틀리게 된다.   일본사람들이 불교사찰터를 이해하기 쉽게 양식 분류해 놓은 것을 불교 문화이해의 정석인양 무조건 암기하다가 막상 불교 문화의 발생지인 인도와 간다라유적을 답사하면서 비참하게 무너진 잘못된 고정관념을 깨고 백지상태에서 스투파와 불상 그리고 건물터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는 새로운 문화재 산책의 습관을 길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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