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때 와룡이 ‘와읍(臥邑)’으로 둔갑(?)   양북면 와읍으로 가기위해 덕동호와 황룡골짜기를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옆 산자락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헤치고 노란 산수유 꽃이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복슬복슬한 강아지새끼처럼 귀여운 갯버들강아지들도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봄을 속삭이고 있었다.    와읍은 본래 마을 어귀에 솟아있는 동산(洞山)에서부터 거랑바닥까지 길게 내려와 누워있는 사발바위가 마치 용이 내려와 누워있는 것 같다고 하여 와룡(臥龍)이라고 하였다. 이 마을이 와읍(臥邑)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의 일이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던 문무왕의 수중릉과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가 지척에 있는 이곳에 와룡이 있다는 게 왜놈들에겐 못마땅했을 건 뻔한 이치다. 그래서 와룡을 슬그머니 와읍으로 바꿔버린 것은 아닐까? 6개의 작은 마을로 이루어져   이 마을은 또 기와굴이 있던 곳이라 ‘왓골’, ‘왯골’이라고도 불렀다.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타고 추령재를 넘어 기림사와 골굴사의 입구인 안동을 지나면 와읍주유소가 있고, 와읍교가 나온다. 그 왼쪽 골짜기가 와읍이다. 와읍은 ‘굴바우’, 능골‘, ’연당‘, ‘신리’, ‘공장마을’, ‘중테’ 등 6개의 작은 마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마을이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거랑을 중심으로 서편에 ‘굴바우’ 마을이 있고, 북쪽 골짜기로 더 들어가 용동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신리’가 있고, 그 안 골짜기에는 ‘공장마을’이 있다.  용동교에서 왼쪽으로 가면 용동과 권이리에 이른다. 와읍마을회관이 있는 굴바우에서 거랑 건너 동편에는 2004년에 들어선 ‘한전방제센타’가 있고, 그 동편 언덕배기에 ‘능골’이 있다. 능골에서 북쪽으로 등성이를 넘으면 ‘연당’이고, 동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중테’에 이른다.   본래 이 마을은 1, 2리로 나뉘어 있었으나, 50여 년 전에 한 마을로 통합했다고 한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산간지역이다보니 밭이 많아 밭작물도 많이 한다. 가축은 한우 100두, 젖소 50두, 사슴 7두, 양 40두 등이다. 이 마을도 멧돼지, 노루 등 산짐승들에 의한 농작물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와읍은 107가구에서 250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내외가 함께 사는 다복한 ‘능골’   굴바우 마을 서쪽 산기슭에 굴바위가 있어 마을이름을 ‘굴바우’라 했다고 한다. ‘굴암(窟岩)’ 혹은 ‘굴암리(窟岩里)’라고도 한다. 능골 서북쪽에 있으며 와읍마을회관이 있다. (27가구)     능골 마을이 능선으로 둘러싸인 구릉 위에 있어 ‘능곡(陵谷)’, ‘능동(陵洞)’이라고 하며, 연당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또 능처럼 생긴 등성이에 마을이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요즘 대부분의 시골마을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혼자 사는 집이 많은 편인데, 이 마을은 혼자 사는 사람은 한 집도 없고, 모두 내외가 같이 살고 있다는 다복한 마을이다.    신리(新里) ‘새마을’이라고도 하며, 굴바우 북쪽에 70여 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5가구)   공장마을 약 50년 전인 일제시대 때 이곳에 광산이 들어서면서 생긴 마을로 근처에 규조토 공장이 있으므로 ‘공장마을’이라고 한다.  굴바우 북쪽 골짜기 끝으로 예비군교장 아래에 있다. (7가구)   당나무 마을 앞 등성이에 서있는 500여 년 된 느티나무로 이 일대에는 느티나무 4그루를 비롯한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있다. 매년 정월보름날 당제를 지내다가 당제를 모시는 사람 정하기가 어려워 10여 년 전부터 칠월칠석날 지낸다. (25가구)   연당(蓮塘) 마을 한가운데 있는 못에 연꽃이 많이 피었으므로 마을이름을 ‘연당’이라 했다고 한다. 능골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천석꾼이 나오는 명당과 장군이 나오는 명당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고개의 혈을 잘랐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마을 동북쪽 등성이가 잘록하게 잘린 채 대안골로 가는 길이 되어 있다. (18가구)    중기(中基) 마을의 모양이 마치 묘지와도 같으며, 마을 위치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여 ‘중터’ 혹은 ‘중기(中基)’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마을 가운데 묘지가 있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도 마을 한가운데 함양박씨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기는 어일에서 감포 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옆에 있다. 위치상으로 볼 때 어일리에 포함되어야 하는데 와읍에 속해 있다.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이 마을 어른들이 장테(어일장)로 가기 싫다고 하여 와읍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20가구) 매월 초하루 보름 분향   우천서당(遇川書堂) 이간(夷簡) 이종생(李終生)과 우옹(遇翁) 이일형(李日馨)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74년 능골에 세운 재실이다. 이종생은 조선 정종의 제 6남 진남군(鎭南君)으로 예종 때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이다. 이일형은 이종생의 13대손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종묘사예(宗廟司藝)에 추증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이곳 와읍으로 옮겨와 후진 양성에 크게 힘썼다. 경주에서 양북으로 가다가 와읍교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이 서당은 4칸 팔작지붕으로 둥근기둥에 가운데 마루를 배치하고 양쪽에 방을 두었으며, 공포를 설치한 전통건축양식으로 지었다. 뒤쪽에는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매월 초하루와 보름마다 분향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활수정(活水亭) 김제민(金劑民)이란 선비가 공부하던 곳이었는데 그 아들 계수(桂秀)가 추모하여 일제 때 연당에 세운 정자다.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북편에 둥근기둥의 3칸 접집으로 지은 이 정자는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정자를 지은 이가 김정철 전 경주시의원의 증조부이다. 종일 햇볕이 드는 골짜기   우리산 마을 뒤에 있는 큰 산. 중기 위쪽에 있는 마을 공동묘지가 들어선 산 일대를 ‘우리’라고도 한다.   동산(洞山) 능골 서편에 있는 동네 소유의 산으로 지금은 개인소유이지만 동산이라고 부른다. 와읍주유소 북쪽 산이다.    닛골재 굴바우의 동북쪽에서 감포읍 노동리의 닛골로 넘어가는 고개.   도툿말재 연당의 동북쪽에서 감포읍 노동리의 도툿말로 넘어가는 고개.   토골 주일 안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왜 토골인지는 모른다.    중산골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중산골’이라고 하는데 절은 빈대 때문에 불태웠다고 전한다.   대안골 골짜기가 크고 논이 많은 연당 뒤쪽 안 골짜기이다. 이여송이 잘랐다는 등성이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드나든다.      수제골 연당 북쪽 골짜기로 약물내기가 있다.      주일골 산골짜기이지만 하루 종일 해가 든다고 해서 ‘주일골’이라고 한다. 그 안 골짜기에            일제 때에 막은 못이 있다.     쌍저(雙猪)골 두 마리 돼지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한 골짜기로, 연당 동북쪽에 있다.    용바위 깨어지고 그 흔적만   사발바우 사발 모양으로 생긴 바위로, 굴바우 마을 어귀의 거랑 가에 있다. 본래 이 바위는 마치 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와룡’이라고 했던 바위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동산에서 지금의 와읍거랑을 가로질러 사발바위까지 하나의 긴 바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5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에 이 바위를 깨고 거랑을 이쪽으로 돌리면서 훼손되고 지금은 아랫부분만 남아 있다. 거랑 가운데에 그 흔적이 있다.    굴바우 굴이 있었던 바위로, 굴암리에 있다. 굴암(窟岩)이라고도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바위가 사발바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수캐바위 개가 앉아 있는 형국의 바위로 주일 못 안에 있다. 그 곁에 암캐바위도 있었는데 지금은 떨어지고 없다.    평풍바위 주일골에 평풍처럼 생긴 바위로 주일 못 안에 있다. 일요일 공휴일에 서는 와읍장   주일(晝日)들 연당의 북쪽에 있는 들. 종일 햇빛이 잘 드는 양북의 곡창지대이다.   두들 연당의 서쪽 언덕에 위에 있는 들로 모두 밭이다.   주일못 일제시대에 막은 주일 안 골짜기의 못     월성원자력방제센타 2004년도에 능골 우천서당 뒤쪽에 들어선 월성원자력 방제센타이다.   와읍장 와읍마을 어귀의 다리 옆 공터에는 매주 일요일과 공휴일마다 서는 시골장이 관광    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마을 할머니들이 산나물과 채소 등을 이곳에서     팔기 시작하면서 생긴 장으로 지금은 괘나 알려져 제법 성황을 이루고 있다. 자연에 순응하는 장수마을   산등성이와 계곡 여기저기에 이루어진 작은 마을들이 모여 이루어진 와읍은 예로부터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온 탓일까? 마을주민들의 인심이 좋다고 한다. 산 좋고, 물 맑아, 살기 좋은 마을이며, 장수마을이다. 250명의 주민 중에 90살 넘은 어른이 6분이나 계신다.    마을간 연결도로가 좁고, 가팔랐지만 주민들은 절실하게 바라는 숙원 사업은 없다고 했다. 능골에 경로당을 짓는 일이 숙제였지만 그 마저도 올 3월에 지을 예정이란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연당마을 어귀에 사는 권봉선(전호댁·95) 할머니로 아직 허리조차 굽지 않아 지팡이가 필요 없고, 일상대화는 물론 농담도 곧 잘 하실 정도로 정신도 맑고 아주 건강한 상태였다.  할머니의 건강비결은 채식위주로 적게 먹고, 열심히 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직도 쑥 캐고, 밭도 맨다고 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방희(81·전 양북면장), 허진상(66·서화가 연진미술 장원), 김정철(63·전 경주시의원), 이재준(58·청송 진보중·고등학교 교장), 이재천(57·예비역 육군 준장), 이재근(54·부산대 교수), 이재관(51·부산 내과의원) 등이 있다.   친절한 마을 안내에서 후한 점심까지 대접해주신 황판술 이장님과 이재병 노인회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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