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 까치설날을 일주일 남기고, 함양 산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나뭇가지에는 벌써 연두빛 물이 오르는 소리가 차창을 흔들고 있다. 뭉게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를 듯 하늘을 맑게 나그네를 품어 준다. 첩첩 산골의 대명사 함양 산청이 이젠 대전 충무 간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사통팔달 교통의 요충으로 변해 있었다.    함양은 통일신라시대 때는 천령군이었다. 이곳 태수를 지낸 고운(해운) 최치원이 조성한 상림이 오늘날 함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명물이 되어 있다.   문창후 최치원(857·문성왕 19∼?)이 누구인가. 경주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로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신라 말 대 문장가이며, 쇠약한 신라 하대를 개혁하려다가 결국 진골귀족들의 옹졸함에 지쳐 지리산에 은거하여, 후일 그곳의 산신이 되었다고 하는 분이다.    최치원의 세계를 살펴보면, 그의 아버지는 견일이며 사량부 사람이다. 그가 6두품을 ‘得亂’이라 한 것으로 보아 6두품 출신이 아니었나 한다. 12세에 당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치원의 아버지는 “10년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하라” 했다고 한다. 이에 치원은 스승을 따라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드디어 874년 빈공과(외국인들을 모아 놓고 치르는 별시)에 장원급제하기에 이른다. 아무리 외국인을 위한 별시라고는 하나 당나라 주변 여러 나라에서 모인 수제들이 겨루는 별시에서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하여 신라인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이후 당나라 관계(官階)에 승승장구하여,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의 난’을 진압하러 간다. 치원은 여기서 난의 수괴 황소에게 ‘격황소서’를 일필휘지로 써 보낸다. 말 위에서 이 글을 읽던 황소는 그만 말에서 떨어질 정도로 위엄이 있는 명문장이었다고 한다.    이곳 상림은 원래 상·하림으로 조성되었는데 현재는 상림만 남아 있다. 약 2.1㎞나 연이어 있는 상림은 황홀한 가을을 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고운이 느꼈을 외로운 심사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해주고 있다. 당나라에서 선진 국제 질서를 익히고 돌아 온 치원은 말기적 혼란의 중심에 있는 신라 왕실을 위해 시무책을 올리기도 하지만, 이미 해지는 석양인 신라 조정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백운산, 지리산으로 둘러싸인 함양은 서라벌과 너무나 흡사하게 고을이 조용히 앉아 있다. 지조 있고 고집스러운 인심 또한 우리네 서라벌과는 판박이 같이 닮아 있다. 신라 당대에는 수도 서라벌과는 상당한 거리였을 것인데도 이렇게 쌍둥이처럼 닮은 것은 무슨 연유에서 일까? 혹시 화랑들의 주요 주유천하처인 지리산 때문이 아닐까? 청소년 수련단체에서 출발하여 삼국통일의 구심점이 되는 화랑들이 그들의 호연지기를 지리산에서 기를 때 이곳 함양의 청소년들도 함께 하였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리라. 또한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라벌 화랑과 이곳 함양의 청소년들은 서로 벗으로 사귀며 뜻을 함께 모았을 것이다.    온갖 상념이 상림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는 기자에게 어깨동무로 다가온다. 함화루, 사운루, 이은리 마애석불,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등이 산책의 길동무가 되기에 충분하게 조금씩 떨어져 자리하고 있다. 동행을 흔쾌히 자처한 이곳 출신 벗의 상림 자랑에 추운 겨울바람이 오늘은 따뜻한 봄바람 같다. 서라벌에 계림이 있다면 함양엔 상림이 있어 정말로 여기가 서라벌인양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차제에 서라벌과 함양은 이런 전통을 함께 나누는 의미있는 축제라도 열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은 바람이 매섭다. 고운의 체취를 맡으러 길을 나선 기자에겐 이곳 함양은 많은 것을 조목조목 이야기 해 준다. 궁금증이 길머리를 잡기에 충분하다. 서둘러 조선 여성으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왜적을 물리친 신안 주씨 의녀 논개의 묘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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