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학이 날았다는 ‘청학동(靑鶴洞)’ 내남면 상신1리(上辛一里)   내남면 상신리를 찾았을 때가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산 야초와 나무는 이미 가을부터 준비해 온 새싹을 조심스럽게 밀어 올리고 있었다. 산과 들에 있는 초목들이 따뜻한 봄날 갑자기 싹이 돋는 게 아니다. 혹독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내 땅속에서는 열심히 새싹을 키워왔고 이제 서서히 봄맞이를 시작한 것이다.   상신은 본래 ‘맏신’으로 덕천과 박달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내남면사무소가 있는 이조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면 덕천이다. 덕천을 지나 이조거랑을 건너면 왼쪽은 안심이고 오른쪽이 상신이다. 이조거랑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박달 쪽으로 오르면 거랑을 끼고 수미산 기슭에 펼쳐진 상신마을에 이른다. 이 길을 따라 계속가면 박달리와 비지리를 거쳐 화천리로 연결된다.   덕천은 경부고속철도 터널과 교각 공사가 한창이었다. 덕천리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놓인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늑한 시골 풍경을 한 순간에 망쳐 놓았다. 경부고속도로가 절단을 내더니 그 위에 고속철도까지 난도질을 한다. 빠르고 편리하면 환경파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인간의 이기심에 겁이 난다.   상신은 본래 ‘맏신’ ‘만신’ ‘마신’이라 불려오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한자로 표기하면서 상신리(上辛里)로 되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 ‘맏신’이라고 불렸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전해오는 바가 없다. 다만 옛날에 마을 타고 다닐 때 이곳이 쉬어가는 곳이라 말을 풀어서 풀도 먹고 쉬게 하였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고, 따라서 이와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마신’의 ‘마’과는 거리가 멀다. 또 ‘신(辛)’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어 앞으로 더 연구가 되어야할 것으로 보인다.    양지마을·청학골·숲마을을 상신1리, 평리마을· 귀계를 상신2리, 광석이 상신3리에 해당한다.    숲이 짙어져 나물 안 나   상신1리는 박달로 가는 가장 안쪽에 위치한 청학동과 효자각이 있는 숲마을, 그리고 수무산 아래 양지바른 기슭에 자리한 양지마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청학동과 양지마을·숲마을은 거리도 좀 떨어져 있고, 마을회관도 별도로 지었으며 노인회장도 두 명으로 각기 다른 마을로 생활하고 있다. 총 60가구에서 150명의 주민들이 생활하고 있다. 마을주민들의 평균연령이 70대를 훌쩍 넘는 초고령 마을이며 아이가 있는 집은 4집뿐이라고 한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소는 집집마다 1~2마리를 기르는 정도이다.  옛날에는 참나물, 취나물, 고사리, 삽주 등 나물이 많이 났으나 숲이 짙어지고는 나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도 높은 산에 둘러싸여 있어 산돼지 등 짐승들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크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청학동에 사는 이상채(90·구미어른) 할아버지다. 효자각 선 효자마을   양지마을 수미산 남쪽 양지편 자락 이조거랑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음지쪽에 있던 마을은 약 50여 년 전에 폐허가 되고, 지금은 양지쪽의 마을만 남아 있다. (24가구)   숲마을 본래 숲이 있던 곳에 소나무숲을 치고 마을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숲이 없다. 양지마을 남쪽 이조거랑 건너편에 있다. 마을회관이 여기에 있다. (13가구)    동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왔으나 20여 년 전부터 칠월칠석날에 지낸다.   당나무 본래 오래된 느티나무(약 500년 정도)가 있었으나 1974년 큰물에 떠내려가고 그 해 진등 자락에 후계목으로 은행 나무를 심었다.  마을회관 앞에 있다.   청학동(靑鶴洞) 맏신의 서쪽에 있는 마을 로 옛날 이 마을은 소나무 숲이 우거져 철따라 많은 청학(靑鶴)이 날아와 살았다고 하여 ‘청학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름으로는 ‘청각골’, ‘청각곡(靑角谷)’이라고도 한다. 수미산의 진등 기슭에 자리한 이 마을은 본래 청학골 앞에 있었으나 70년 전에 불이 나 마을전체가 타고 난 후 지금의 늦채골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동제 이 마을도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내 왔으나 당나무가 떠내려간(1974년) 후부터는 7월 보름날에 지낸다. (23가구) 단성 백성들이 심은 향나무   상신리 효자각(上辛里 孝子閣) 효자 최치 백(崔致伯)의 효행을 기려 조선 영조 28년(1752)에 정려되었다. 최치백은 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를 하면서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맏신에 있는 이 비각의 비문 글씨는 명필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가 썼다. 본래 음지마을에 있던 것을 마을 사람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근래에 와서 그 자손들의 왕래도 끊어지고 행정당국에서도 관리가 소홀한 탓인지 효자각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붕은 기와가 벗겨진 채로 방치되어 있고, 홍살이 부서지는 등 낡고 훼손이 심하다.   수산정(壽山亭) 성균관 생원을 지낸 수암(壽庵) 손억(孫億)이 문경현감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諱 가권(可權)]과 단성현령을 지낸 아버지[諱 강(康)]을 기리기 위해 1441년에 수무산 기슭에 세운 정자이다. 그 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친 뒤 낡은 삼간초옥을 헐고 1920년에 새로 지었다. 둥근 기둥으로 3칸접집 팔작지붕에 귀마루를 사방으로 다 돌렸다. 1986년에 전참봉 박영배가 중수기를 썼다. 정자 양쪽에 수령 150년 정도 되는 은행나무 2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덕암제(德巖齊)와 가묘 행주기씨 19세 덕암 언협(彦協)을 추모하여 경주문중 후손들이 1992년에 수무산 기슭에 건립한 제숙처(齊宿處 묘소 밑에 지은 제실)로 그의 호를 따서 덕암재라 하였다. 둥근기둥을 사용한 4칸접집 팔작지붕으로 중앙에 마루를 배치하고 양쪽에 방을 배치했다. 덕  암제 동편에는 행주기씨 가묘가 있다. 이 가묘가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앞에 200여 년 된 배롱나무 3그루가 가묘의 건립연대를 추증하게 한다.    향나무 수령 600년으로 추증되는 향나무로 단성 현령을 지낸 손강(孫康)의 선정에 감화된 단성주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기념식수 했다고 한다. 월성군 때에 보호수로 지정했다는데 표시석은 없다. (도움말: 손종규 79세 손강의 18세손)  골짜기 깊어 잎이 늦게 피어   수무산(스무산) 옛날 해일 때 스무명 정도가 피할 수 있을 만큼만 남고 모두 물에 잠겼다고 하여 ‘스무산’이라고 했다고 하며, 또 물이 없어 ‘수무산(水無山)’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열두 등성이를 다 뒤져도 물이라고는 나지 않는다고 한다. 수미산(壽眉山)이라고도 부른다. 양지마을 뒷산이다.     진등 청학동 마을 뒷산으로 등성이가 길다고 하여 ‘진등’이라고 부른다.   늦채골(晩菜谷) 골짜기 깊어 풀과 나물이 가장 늦게 피어난다고 하여 ‘늦채골’이라고 한다. 최근에 한자로 표기하면서 ‘만채골’이라 부른다.   과부골 청학골 앞쪽 골짜기로 옛날에 과부가 피난했다고 한다.   장아골 임진왜란 때 아이를 피난시켜 감추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초막골 장아골 등 넘어 있는 매우 깊은 골짜기로 옛날 시묘살이 하던 초막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도둑골 오막하게 입구가 막혀 있는 깊은 골짜기라 도둑골이라고 한다.   장자테 마을 앞산 등성이에 펀펀하게 넓은 터로 옛날에 이곳에 부자가 살았는데 딸이 물 뜨러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후로는 이사가고 폐가가 되었다고 한다.   큰덕골 수미산 남쪽 자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가 길고 깊어 큰덕골이라 했다.   작은 덕골 큰덕 아래에 있는 작은 골짜기. 만병통치의 약목폭포   약목폭포 늦채골 안쪽 골짜기에 있는 폭포로 물이 차고 약성이 높아 피부병이나 각종 질병을 낫게 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약 2km 정도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산 8부 능선쯤에 이 폭포가 있다. 가뭄이 심해서인지 높이 7m에 이르는 이 폭포에는 고드름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낙수가 땀을 식혀주었다.      소림재 수미산 동쪽골짜기 맏신 북쪽에서 화곡리의 송림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기린재 맏신에서 화곡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길을 통해 망성과 효현을 거쳐 경주로 다녔다고 한다. 옛날에 당나무와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며 ‘당고개’라고도 부른다.   진바람 바람이 세게 부는 곳으로 바람이 진을 친다고 하여 ‘진바람’이라고 부른다. 모량바람도 유명한데 모량바람이 사돈하자고 하니까 안 한다고 했다고 할 정도로 바람이 세다. 산자락이 양쪽에서 고개를 내밀고, 골짜기가 모여서 병목현상이 생겨 바람이 아주 세게 부는 곳이다.    수통골재 청학동의 남쪽에서 안심리 수통골로 넘어가는 고개. 양지마을 -청학동 연결도로 포장   양지마을과 청학동의 마을간 연결도로가 부지는 확보되어 있지만 포장이 안 되어 통행이 불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이조거랑을 건너 도로로 나왔다가 다시 거랑을 건너 들어가는 불편함이 있다. 이에 대한 조속한 조치를 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숲마을은 지난해 경로당을 깔끔하게 새로 지었다. 22평의 현대식 건물로 지은 이 경로당은 다른 마을처럼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시설이 참 실용적으로 잘 되어 있었다. 겨울철이면 온 마을 노인들이 경로당에 다 모여서 윷놀이도하고 점심도 같이 해 먹고 공동생활을 한다고 한다.    마을 이장은 “집에 있으면 개별난방을 해야 하는데 경로당에만 불을 피우면 온 마을 노인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가 있다”며 “국수도 삶아 먹고 같이 생활하니 주민화합에도 좋다”고 한다. 참 지혜로운 생활 방법이다. 이 날도 국수를 삶아 20여명의 주민들이 같이 점심을 먹었고 우리 취재진도 맛있는 국수로 점심을 해결했다.    박상우(54·내남면 민원실) 계장은 이 마을 출신으로 청학동에 마을회관을 지을 때 자신의 땅 100여평을 흔쾌히 마을회관부지로 기증했다. 지금도 마을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다.   손낙조(62 전 경주시 산업환경국장), 손영기(43 대구고검)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밥그릇에 눈물 죽 그릇에 웃음”   “밥그릇에 눈물 나고 죽 그릇에 웃음난다.”고 했던가? 서로 양보하고 욕심을 버리면 행복한데 요즘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너무 욕심을 부린다고 하신 한 어른의 말씀이 돌아오는 내내 가슴에 맴돌았다.    “기자양반들보다 내가 더 나아”하시며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목폭포까지 산길을 안내해주신 이상훈 노인회장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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