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적가’로 도적떼를 감화시킨 석(釋)영재   소한추위가 엄습하여 온 대지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겨우내 그래도 푸름을 간직하던 침엽수 역시 북풍한설에 대책 없이 온 몸을 파리하게 떨고 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실개천 맑은 물도 흐르기를 멈추고, 얼음 속에서 찬바람을 피하고 있다. 어디선가 황진이의 외론 시조 한 수가 나그네를 희망지게 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내어 /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 사랑하는 님 오시는 밤 굽이굽이 펴리라’   맞는 이야기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또 어느 날 멀리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면 서둘러 봇짐을 둘러매고 왔던 길을 가버리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었던가? 기다림이란 다가서기의 한 형태일 것이다. 끝내 속내는 말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고 마는 한갓 미물이 또한 인간이 아니던가? 누군가 낮은 데로 임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 김수영은 이렇게 노래했다.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그날이 오면 때때옷 입고, 맑은 마음으로 짚신 신고, 삼태기 가득 향가의 흔적을 지고, 다시 서라벌 골골을 청려장으로 마음껏 걸어가리라.    경부고속도로 서(西)울산 나들목으로 빠져 나와 언양읍내를 가로 흐르는 강변도로를 내달린다. 도로 양옆은 장날을 맞아 온갖 노천 시장이 자리를 잡고 있고, 조그만 장터는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반가운 인사로 왁자지껄 하다. 뻥튀기기가 하얀 연무를 뿜으면 우르르 달려가서 한 움큼씩 집어 먹던 그 옛날이 오늘은 여기서 재현되고 있다. 기행의 참 즐거움은 우연히 마주치는 장날이라고 할 수 있다. 소머리 국밥을 50년 전통 원조집에서 한 그릇 비웠다.    강변도로를 따라 석남사 방향으로 길머리를 잡는다. 일요일치고는 너무 도로가 한산하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엔 휑하니 거친 바람만이 나뒹굴며 나그네를 바라본다. 간간히 마주치는 아지매들도 수건으로 온통 얼굴을 가려 히잡을 두른 이슬람 여인네를 보는 듯하다.    왼쪽은 석남사, 오른쪽은 경주로 빠지는 삼거리 갈림길이 나타난다. 여기서 차를 세워 놓고 정면을 바라보면 희멀건 산 사이로 난 고갯길이 아스란이 다가온다. 지금 기자가 서 있는 곳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이다. 멀리 보이는 고개를 넘으면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다. 천년 전 통일신라시대 때는 여기도 상당히 깊은 골짜기였을 것이다. 고개를 넘으면 신라 황도 서라벌 턱 밑이니, 사방에 도적떼가 득시글하였을 것 같다. 때는 신라 38대 원성왕시절이었다.    천성이 활달하고 재물에 얽매이지 않으며 또한 향가를 잘 지었던 영재란 스님이 있었다. 세월은 흘러 서산에 해지는 나이가 되자 영재는 모든 세파를 뒤로하고 남악(지리산으로 추정)에 들어가 향가나 읊으면서 생을 마감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아니 후일 해운 최치원도 지리산 산신이 되었다고 하니, 이미 이 때 영재가 그러한 생각으로 지리산을 찾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서라벌을 출발한 영재는 무열왕릉을 지나 소태(牛峴)고개를 넘어 모량리 화천마을을 가로질러 방내리에서 산으로 올랐을 것이다. 이윽고 단석산에 도착한 영재는 유신랑의 단석으로 잘려진 단석산 화랑들의 성지에서 오랜만에 화려했던 과거와 만남을 가지면서 다시금 온 골짜기에 울려 퍼졌던 향가를 한 소절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잊혀져가는 천년신라의 노래 향가를 부여잡고 회한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 같다.    다시 터벅터벅 우중골을 지나 현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갑자기 천둥소리처럼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더니 험상궂은 산적 60여명이 시퍼런 칼날로 영재를 에워싸고 있었다. 보통사람 같으면 오장육부가 줄행랑을 칠 것도 같은데 영재는 입가에 미소만 가득하였다.   놀란 것은 오히려 도적들이었다.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짐작한 도적들은 조심스럽게 존함을 물었다. ‘나는 영재이니라’ 하니 도적들은 더욱 놀라는 낯빛을 하였다. 향가 잘하기로 서라벌에 파다한 영재스님이란 것을 알아차린 도적들은 그에게 향가 한수를 지어달라고 애원하였다.   향가란 천지귀신도 감동한다는 노래가 아닌가. 아무리 도적이라고 하지만 수많은 이적을 보인 향가의 주술성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영재는 양지바른 곳에 앉아 예의 웃음 띤 온화한 얼굴로 향가를 불렀다. 현대어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 마음에 형상을 모르려던 날      멀리 ○○ 지나치고      이제는 숨어서 가고 있네      오직 그릇된 파계주를      두려워할 짓에 다시 또 돌아가리      이 쟁기를 사 지내곤      좋은 날이 새리이니      아으 이 요만한 선은      아니 새 집이 되니이다   노래를 마치자 도적들은 고마움의 표시로 비단 두 필을 공손하게 바쳤다. 그러자 영재는 손사래를 치며 웃으면서 가만가만 말하였다. “재물이 지옥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피하여 깊은 산에 숨어 일생을 보내려 하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것을 받겠는가?”하면서 비단을 멀리 던져 버렸다.    이런 영재의 행동에 도적들은 그만 눈물을 흘리면서 신주처럼 모시던 창과 칼을 던져버리고 앞 다투어 머리를 깎고 영재의 제자가 되었다고 \`삼국유사\`피은(避隱) 영재우적조에 전하고 있다.    울산광역시 상북면 덕현리에서 경주쪽으로 몇 발짝 가면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을 알리는 대리석 입간판이 영재스님 마냥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옆에 엉성한 팔각정과 나무로 만든 의자 몇 개가 단촐하게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바람이 제법 세차게 얼굴을 파고든다.    이곳을 영재스님이 넘던 대현령으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지명이 울주군 쪽이 덕현리이고, 경주시 쪽이 대현리이니 이렇게 비정해 보고 싶다. 또한 도적떼가 쉽게 한 건을 하려면 서라벌 지척에 있는 험준한 고갯길을 골라서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쉬어가는 것도 또 하나의 노정이 아닌가 한다. 바쁜 마음만이 자꾸 발길을 이끌고 있지만, 세상은 그저 오늘도 그냥 하루이기만 하다. 그러나 천년 전 온 서라벌에 가득하였을 향가의 발자취를 찾는 기행은 언제나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도 서라벌 골목마다 그날처럼 향가가 왕성히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날은 올 것이다. 반드시 오리란 희망이 꽁꽁 언 냇물을 뚫고 하늘로 솟구치며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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