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겨울답지 않게 사뿐히 내려선다. 온 누리에 생물들이 봄이라도 온 양 봄볕 재촉하기에 여념이 없다. 겨울은 겨울다워야 겨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자연훼손에 대한 응보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금이 당긴다.   어느 일간지에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예년 보다 빠른 매화의 꽃망울을 보는 순간 그래도 가까이 오는 봄을 맞을 희망에 부푸는 것이 우리네 인간의 삶이 아닌가?   한문에 ‘인(仁)’자가 있다. 우리는 어질 인으로 익힌다. 그러면 ‘인(仁)’한 것은 어떤 것일까? 결국 어질어야 ‘인(仁)’하다는 말이다. 누구나 어진 사람을 표현할 땐 그 사람이 지금 처해있는 역할에 충실한 사람을 어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국 한 사람의 남자는 집안에서는 가장다워야 하고, 또한 아내에게는 남편다워야 하며, 자식들에겐 아버지다워야 하고, 회사에서는 사장님, 부장님, 과장님다워야 어질다는 것이 된다.   충담사가 이 같은 얘기를 한 것이 ‘안민가’이다. 물론 논어에도 나오는 말이지만 참으로 적절한 표현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누구나 어질다는 평가를 받고 싶으면 지금 자신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거지를 해야 한다는 명언인 셈이다.   대통령이 신년연두 기자회견을 공중파 티브에 생중계로 거침없이 진행하였다고, 소금물에 미꾸라지마냥 온 나라가 야단이 법석이다.    ‘답다’라는 말을 듣기가 이처럼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주위를 둘러보면 해답이 보일성도 한데 모두가 딴죽만 걸고 있는 모양새가 영 사납다.   일찍이 충담사는 화랑 기파랑을 찬미하는 향가를 불렀다. ‘찬기파랑가’라고도 하고 ‘찬기파랑사뇌가’라고도 하는 향가 최고의 자리에 문학성으로 올라 있다.   오늘날도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화랑 기파랑의 고고한 인격을 수채화를 그리듯 아름답게 풀어내고 있다. 달, 흰구름, 모래, 물가, 등 자연물을 기파랑의 화랑도로써의 인품으로 그려내는 솜씨가 향가를 천년신라 최고의 문학성을 가진 갈래로 인정하기에 충분하게 하고 있다.   ‘찬기파랑가’를 현대어로 불러보면‘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        모래 가르며 흐르는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로다, 수풀이여        일오의 냇가 자갈벌에서        마음의 끝을 좇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이토록 충담사가 사모한 기파랑은 누구인가?   득오가 사모한 ‘모죽지랑가’의 죽지랑은 역사의 전면에 자주 모습을 보여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는 단서를 얻을 수 있었지만 기파랑은 단 한 줄의 역사서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신라 35대 경덕왕대의 시중 김기라는 설이 있고, 또한 표훈대사라는 설이 등장하였지만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줄 정도의 확실한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   화랑들이 맹활약하던 삼국통일기를 지나자 전제 왕권에 늘 위협의 대상인 화랑들은 그만 나라의 근심거리로 내몰리게 된다.   통일 완성직후 31대 신문왕대에 결국 화랑제도 자체가 폐지되고 만다. 신궁에 봉사하는 것으로 시작된 화랑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문왕의 모후인 자의태후가 오래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화랑제도를 다시 부활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나가게 된다.   이후 약 100년의 세월이 흘러 충담사가 ‘찬기파랑사뇌가’를 부르면서 사모한 기파랑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의문의 연속이다. 사실 경덕왕대에 오면 화랑들이 주요한 창작자인 향가가 가장 많이 불러졌다고 ‘삼국유사’는 말한다. 그리고 신라 26대 진평왕대에 ‘서동요’가 가장 이른 시기의 향가라고 학계에 알려져 왔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발견으로 향가는 진평왕의 할아버지 24대 진흥왕대에 사다함과 미실이 불렀다는 ‘청조가’와 ‘송출정가’가 들어 있어, 향가 최고 자리의 주인이 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화랑들은 아마도 경덕왕대에 오면 무사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그들의 전통인 향가나 부르면서 유오산수 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충담사가 차 달이는 도구를 앵통에 지고 다녔던 것을 두고, 그를 치병을 하는 의원의 모습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는 등 충담사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쇠약한 화랑들이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판단된다.   충담사가 기파랑이라는 화랑의 고고한 인격을 매우 사랑하였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를 한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하였듯이 이때는 화랑이라고 해봐야 향가나 부르면서 왕궁에서는 더욱 멀어져 가는 저녁나절의 신세였던 것이다.   혹시 충담사가 역사의 전면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고매한 인품을 가진 화랑 기파랑을 찬미함으로써 잊혀져 가는 화랑들을 되살리려는 의도에서 향가를 부르고 다닌 것은 아닐까? 또한 이 노래가 입에서 입으로 온 서라벌 거리에 불리게 되자, 통일기의 안정에서 하대의 혼란을 감지한 경덕왕이 간접적으로 향가를 이용하여 민심을 수습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경덕왕대의 왕권의 흔들림은 ‘삼국유사’에만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다. 해가 둘이 나타났다는 것도 그렇고, 왕의 생식기가 몇 촌이라든지, 아들이 없어 표훈대사의 도움으로 딸로 태어날 운명인 아기를 아들로 태어나게 하였다는 것 등 혼란을 예고한 많은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이와는 사뭇 다르게 경덕왕대의 혼란을 기록하고 있다.   천제지변은 여러 차례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어느 왕 때나 흔히 나타나는 것이고 보면 이상하다고 할 것이 못된다. 특이한 것은 시중이나 상대등 등 신하들이 자주 자신의 자리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최고위직 신하들이 자주 바뀌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안정기를 지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일본 사신이 두 번 내방하는데 두 번 모두 만나주지 않고 돌려보냈다는 기사와 전국의 주군현의 이름을 중국식 한자로 개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당나라식 통치방식으로 탈바꿈하였다는 것은 서라벌 사회에 많은 진통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유연하지 못하고 고집스러운 경덕왕의 성품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어느 시기나 고집스럽고 외골수인 위정자를 만나면 민초들의 생활은 더욱 고달파지는 게 보통이다. 앞서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아우르면서 발맞춰 가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가 우리 곁에 와 있다. 다시금 옷매무새를 고치고, 천지귀신도 감동케 하였던 향가를 한 수 불러보는 것이 어떠한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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