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바즈 가르히 아쇼카 석각
역사에 가정이란게 존재할까? 만약에 인도에 아쇼카왕(BC272-BC231년 재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도불교는 물론 현대의 한국불교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자.
고대인도 최초의 통일왕조 마우리아 왕국의 아쇼카 왕이 근본 8탑 중 7개를 이어서 8만4천 여개의 수많은 불탑을 세우고 동·서·남·북 국내외로 전법사를 파견하여 불교를 중흥시키지 않았더라면 중국을 통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스리랑카를 통한 동남아로의 불교전래도 없었을 것이 아닌가? 찬란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도 알고보면 아쇼카왕의 포교활동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본다. 그로인하여 황룡사지 금당터의 장육존상과 관련한 전설에도 아육왕(아쇼카왕의 한문번역)이 보낸 황금이야기가 등장한다.
아쇼카는 광활한 마우리아 왕조 영토 중 중요한 불교성지에 아쇼가 석주와 석각을 세웠고 거기에 당시의 지방문자로 아쇼카 법칙을 새겨 두었기에 불교역사를 추적하는데 아주 소중한 고고역사학적인 유적자료가 된다. 현대 인도 인구의 80%가 힌두교도이지만 인도의 상징은 아직도 사르나트 야쇼카 석주의 상부에 있던 4마리 사자상이 차지하고 있다.
인도를 찾은 사람은 산치, 사르나트, 바이샬리 등의 스투파 근처에 있는 아쇼카 석주를 쉽게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쇼카의 다르마법칙을 바위에 새겨놓은 아쇼카석각은 좀처럼 보기가 힘이 든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지난 11일 오후 3시경 경주박물관대학 2007년 인더스문명과 간다라미술 해외유적답사반에게 아쇼카 석각을 직접 볼 행운이 다가왔다.
애초에는 1월 10일 스왓밸리에 있는 스왓박물관과 붓카라유적을 답사하고 다음 날인 11일에는 힌두와부다와 싱게레라 스투파를 보고 말라칸드 패스의 험난한 준령을 넘어 탁트바히 사원을 답사하고 점심식사후 12일의 탁실라 유적답사를 위해 이슬라마바드로 가는 도중에 탁트바히 사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그 귀한 아쇼카석각 유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일정을 추가하여 샤바즈 가르히로 버스를 몰았다.
샤바즈 가르히의 작은 산 기슭에 있는 약 100여미터 떨어져 있는 두 바위에 카로슈티 문자로 새겨진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의 아쇼카 석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의 감회는 정말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찬 기분이었다.
현존하는 14개의 아쇼카 석각중 파키스탄 영내에 2곳(샤바즈 가르히와 만셀라)은 카로슈티문자(간다라문자의 지방방언)이 남아있고, 아프카니스탄 칸다하르에 있는 아쇼카 석각은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이 샤바즈 가르히 아쇼카 석각은 630년에 현장 스님도 다녀갔던 곳이라 한다.
참고로 고대 인도에서는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간다라지방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였고 페르시아의 언어는 아람어였는데, BC4세기경 탁실라의 유명한 사스크리트 학자인 파니니(Panini)가 아람 알파벳으로부터 카로슈티 알파벳을 만들어 내면서부터 페샤와르, 탁실라, 스왓 등 간다라 지방의 언어는 카로슈티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기에 샤바즈 그라히와 만센라에 있는 아쇼카 석각엔 카로슈티 문자가 새겨져 있고, 아프카니스탄의 칸다하르 아쇼카 석각엔 그 지방 언어인 아람 문자로 새겨진 사연이란다.
당초 답사계획에 없었던 그리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샤바즈 가르히 아쇼카 석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카로슈티 문자도 직접 손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산스크리트어, 카로슈티문자, 아람문자등 고대문자의 역사적 생성과정 등을 배우고 익힌 점, 그리고 1400여년 전 현장 스님의 발자취가 어린 역사적인 현장이라 답사의 의미가 깊었고 아직도 현장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파키스탄 샤바즈 가르히 아쇼카 석각1을 찾은 경주박물관대학 간다라문화답사반 일동 과 카로슈티 문자가 새겨진 또 다른 아쇼카 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