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  임금님께 향가로 훈수(訓手)한 충담사 -(上)   겨울비가 먼지 만하게 내리고 있다. 자꾸 비님을 내려 보내시는 걸 보면 봄도 멀지 않았나 보다. 한겨울에 느끼는 봄에 대한 그리움은 또 하나의 문학을 낳는 도구인 것 같다. ‘정서의 자연스러운 넘쳐남’이 시(詩)라고 워즈워드는 말했다. 또한 ‘문학 당의정설’ 역시 달콤한 포장을 한 쓰디쓴 인생의 고뇌가 문학이라는 말인 셈이다. 물론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니까 먹게 하기 위해서 달콤한 꿀을 발라 놓았다고 당의정이라고 하지만, 너무 과도한 포장만을 고집하다 보면 문학은 곧 뭍사람들의 곁에서 멀어져 버릴 것이다.    오늘은 왠지 오래된 첫사랑의 소식이라도 들을 것 같은데, 마음 밑바닥부터 쓰라려 오는 것은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독수공방하는 것에 대한 솔직한 표출이라는 생각이 든다.    훠이훠이 하이얀 두루마기가 금오산 정상 부근에서 자유로운 비상을 한다. 새로 태어난 화랑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가신 고청선생님이라도 뵙고 오는 게 마음이 어지러울 땐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삼국통일위인전 앞에 차를 버리고 서출지에 앉아 본다. 지난여름 연꽃 향연에 동참하여 아무 말 없이 족히 서너 시간을 서출지 주위를 배회 했다고 생각된다. 그때 연꽃의 자태가 어찌나 고운지 가슴으로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충담사도 이 길을 걸으면서 수많은 향가의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지금 겨울 한가운데 꽁꽁 언 연못 사이로 향가가 밝게 어리는 모습을 본다. 역시 아름답다. 그 어떤 노래가 이처럼 사람뿐만 아니고 귀신까지도 감동을 시킬 수 있을까?    서출지를 뒤로하고 남산 쌍탑에 닿았다. 잔디가 노랗게 변해져 양탄자라도 되는 양 꼬마 몇이 나뒹굴고 있다. 하하호호 웃음이 싱그럽다. 또 한무리의 서라벌 화랑을 보는 것 같아 무척 반갑다. 어서어서 자라서 하늘 향해 두 팔을 마음껏 벌리고, 세계를 호령할 날이 분명 다가올 것이다. 호주머니에 때절은 사탕 몇 개를 앙증맞은 손에 쥐어 준다. 멈칫 하다가 제법 어른스럽게 고맙다는 인사도 한다. 역시 서라벌 태생은 무엇이 달라도 다르단 말이야. 울퉁불퉁한 시멘트 포장길이 생긴 모양대로 길을 만들었는지, 걷는 것이 천직인 기자에겐 더 없이 정겹게 다가온다.    온 서라벌에 염불소리가 가득하게 하였다는 염불사지가 발굴조사를 끝내고 나신을 드러내고 추위에 떨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까치 한 마리가 쓰러진 탑 옥개석 위에 앉아서 머리를 좌우로 두리번거리고 있다.    금오산을 오르면 항상 떠오르는 것이 하나가 있다. 골골마다 숨어져 있는 수많은 절터하며, 바위마다 새겨져 있는 불상을 보고 있노라면, 말 그대로 불국토의 심장부에 들어 온 것 같은 기분이 옷깃을 숙연하게 한다. 그 때 서라벌인들에겐 금오산 자체가 숭모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역시 금오산은 산 그 이상의 무엇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등산로를 따라 바로 삼화령으로 향했다. 주변에 볼거리를 오늘은 그냥 지나치고 싶었을 뿐만 아니라 연화좌대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을 최대한 크게 하고 걷는다. 겨울바람이 시원하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 잠깐 올라왔다고 느꼈는데 벌써 사방이 훤하게 펼쳐진다. 삼화령이다. 여기를 삼화령으로 추정하는 고청 윤경렬 선생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지금 안춤 자리가 있는 곳에서 보면, 산줄기 셋이 뻗어 있으니 꽃잎파리 셋(三花)에 비유한 것이고, 그 등성이는 영(嶺) 또는 수리(述)인 삼화령(三花嶺)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부처를 파낸 곳이 남산 남쪽 골짜기란 거다. 남산의 남쪽 골짜기가 바로 이 마루의 남쪽 골짜기가 아니고 어디란 말인가?”    그러나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황수영 선생은 남산의 북쪽, 남산신성의 북쪽을 삼화령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경주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이 부처님을 새긴 솜씨가 오래된 양식, 즉 ‘세나라 시절(三國時代)’ 신라 솜씨고, 생의스님이 미륵부처를 파내 모신 때(선덕여왕 13년, 644년)와 맞아 떨어지므로, 이 불상을 생의사의 미륵불로 보고, 이곳이 삼화령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이 부분은 더욱 많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기자는 고청선생님의 주장에 한 발짝 더 다가서서 오늘 삼화령을 찾았다. 연화좌대는 오늘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오랜 과거를 주저리주저리 풀 것이란 기대가 한 순간 멀리서 메아리친다.    때는 신라 35대 경덕왕 시절, 왕권의 안정과 함께 문화가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자꾸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늘에 해가 둘이나 나타나 화랑승(花郞僧) 월명사의 도움으로 겨우 변괴를 막았고, 표훈대사의 도움으로 어렵게 아들을 얻긴 했지만, 경덕왕의 마음은 늘 불안으로 지쳐있었던 것이다.    경덕왕 24년 삼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歸正門) 문루 위에 나와 앉아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에 나가 훌륭하게 차린 중 한 명을 데려올 수 없을까?”하였다. 이때 마침 풍채가 깨끗하게 생긴 대덕고승 한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를 데려와 왕에게 알현시키니 경덕왕은 “내가 말한 훌륭하게 차린 중이란 저런 중이 아니다”하고는 물리쳤다. 또 다시 중 한 명이 누비옷에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며 맞이하였다. 통 속에는 차 달이는 도구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누구냐고 물으니 “충담이라 합니다” 하였다. 왕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재차 물으니, 충담은 “소승은 3월 삼짇날(重三)과 9월9일(重九)이면 남산 삼화령에 있는 미륵세존님께 차를 달여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오는 길입니다”하였다. 충담에게 차를 한 잔 얻어 마신 왕은 다시 물었다. “내가 일찍이 듣기는 대사의 기파랑을 찬미하는 사뇌가(향가)가 그 뜻이 매우 고상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하니 충담은 “그렇소이다”하였다. 이에 경덕왕은 “그러면 나를 위하여 백성들이 편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하니 충담은 당장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이 노래가 안민가이다. 노래를 들은 왕이 칭찬을 하며 충담을 왕사에 봉하였으나,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를 현대어로 불러보면,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자애로운 어미요      백성은 어린 아이라 할지      백성이 사랑하는 이입니다.      윤회의 차축을 괴고 있는 갓난이      이들을 먹여서 편안히 하여라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는가 할지      나라를 보존할 길 이노라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하오이다.     오늘날 불러보아도 참으로 맞는 말이다. 대통령이 대통령답고, 국민이 국민다우면 무엇이 걱정일까. 뉴스만 틀면 대통령의 말이 화제꺼리가 되고, 그늘진 이웃들의 추운 겨울나기가 예사가 아니라고 연일 떠들어 댄다. 지금 이럴 때 충담스님께서 돌아와 ‘안민가’라도 불러주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나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그 해답이 서라벌 진산 금오산 정기에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면서 다가서기에 매진해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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