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에 수놓은 관창의 용맹 정해년이 황금돼지라는 행운을 안고, 우리네 얼어붙은 가슴에 희망 덩어리를 던져 놓는다.   2007년 올해는 지난해의 먼지 찌꺼기들을 모두 지구 밖으로 날려 보내어, 진정으로 민초들이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갱제(?)를 살려 달라고, 높은 곳에 계시는 모든 분들께 간절히 바래본다. 매년 하는 소망 품기지만 올해는 왠지 그냥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란 희망을 가진다. 향가와 화랑들의 발자취를 찾아다닌 지도 벌써 일 년이 가까워져 온다. 새싹이 움트는 이른 봄 처음 향가의 향내 맡기를 시작하였을 땐 호드기 소리에 종달새가 지지배배 하던 때였다.   까까중 떠꺼머리 종내기들의 물장구 소리가 신작로를 가로질러 양반집 규방에까지 다다르면 별당아씨 속내만 핑크빛으로 묻어나던 여름에도 굵은 땀방울을 동무 삼아 이 고을 저 고을을 다녔었다. 들판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던 어느 가을날, 노란 단풍 이파리 하나가 연서(戀書)를 재촉하였을 때도 묵묵히 발걸음을 내디뎠었다. 지금 하이얀 솜털 같은 눈꽃송이 한아름 품어다가, 그날 황산벌에서 서라벌 청년의 표상을 남긴 화랑 관창에게 따뜻하게 바치고 싶다.   때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 7년(660)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심장부를 향하여 거침없는 행보를 계속하던 백제로써는 풍전등화 같은 때였다. 백제 31대 의자왕은 서동요의 주인공 30대 무왕의 원자로 때어나 무왕 33년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다. 모후인 선화공주와의 불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의자왕은 등극한 후 초기에 사적으로 큰 이모인 신라 27대 선덕여왕과 여러 차례 전쟁을 했다. 미후성 등 40여개 성을 빼앗기도 했고, 특히 후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사위 품석과 딸 고타소를 대야성 전투에서 죽이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의자왕은 성충 등 충신들의 충언을 귓등으로 듣고, 또한 자신의 자녀 33명을 좌평에 임명하는 등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물론 연씨 국씨 등 백제 8대 대성들 집안의 왕권 견제에 이골이 나서 왕권강화 차원에서 왕자들을 무더기 좌평에 임명했다고 보는 연구가 있지만 지나친 것만은 사실이었다. 결국 사비성을 향해 노도와 같이 쳐들어오는 나당연합군을 온갖 방법으로 회유를 해보지만 역부족이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던가. 백제에는 달솔 계백(階伯)이 있었다. ‘삼국사기’열전을 보면 백제 의자왕 20년(660)에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바다를 건너 신라와 더불어 백제를 치려고 했다.  이때 계백은 5천 결사병을 뽑아 대항하면서 말했다. “한나라 사람이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당해내야 하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와 자식들이 포로로 잡혀 노비가 될지 모르는데, 살아서 욕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쾌히 죽는 것이 낫다” 하고는 가족을 모두 죽였다.   이윽고 황산벌에 이르러 새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뭇 사람에게 맹서했다. “옛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나라 70만 군사를 격파했다. 오늘은 마땅히 각자 용기를 다하여 싸워 이겨 국은에 보답하자”며 힘을 다하여 싸우니 한 사람이 천 사람을 당해냈다. 그래서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네 차례나 격파했다. 사력을 다해 막는 백제 결사대의 용맹함에 서서히 신라군도 사기를 잃어갔다. 이에 신라진영에서는 온갖 묘안을 다 내어보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때였다. 신라장군 품일(品日)의 16세 어린 아들 관창이 홀로 적진으로 돌진했다. 일찍이 화랑에 들어 무예와 정신무장까지도 갖춘 화랑 중의 화랑으로 다저진 관창이었다. 진흥왕대의 화랑 사다함이 15세의 어린나이에 반란을 일으킨 대가야를 일거에 평정한 적이 있었지만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화랑 관창이 유일하다 할 수 있었다. 이때의 일을 ‘삼국사기’ 열전 관창(官昌 : 645~660년)전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660년(태종무열왕 7년) 백제땅 황산벌(현 충남 논산)에서 나당연합군과 계백이 이끄는 백제의 5천 결사대의 대치상태는 계속되고 있었다. 관창의 아버지 품일은 아들에게“너는 비록 어린 나이지만 뜻과 기개가 있으니 오늘이 바로 공명을 세워 부귀를 취할 수 있는 때이니 어찌 용기가 없을손가?”했다. 관창은 곧바로 “예”하고는 말에 올라 창을 빗겨들고 적진에 진격하여 용감히 싸웠으나 수적 열세로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윽고 백제의 원수(元帥) 계백 앞으로 끌려갔다. 계백은 관창의 투구를 벗겨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관창이 나이가 어리고 용기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놀란 계백은 차마 관창을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다. 소년이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년 병사들이야!”하고 살려 보내기를 허락했다. 관창이 돌아와 말하기를 “아까 내가 적지 가운데에 들어가서 장수의 목을 베지 못하고, 그 깃발을 꺾지 못한 것이 깊이 한스러운 바이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하고는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시고 다시 적진에 돌진하여 민첩하게 싸우니 하는 수 없이 계백은 관창을 잡아서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어 보냈다.   이에 관창의 아버지 품일은 그 머리를 손으로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했다. ‘전군이 이를 보고 용기를 내어 뜻을 세워 북을 요란하게 쳐 진격하니 백제가 크게 패했다’라고 김부식은 화랑 관창의 열전을 세워 상세히 전하고 있다.   사실 관창의 용기는 화랑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라벌 젊은 화랑들은 통일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전 군의 사표로써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어린 나이에 단신으로 적진에 돌격할 수 있는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현금을 사는 우리 서라벌인들이 한번쯤 곱씹어 봐야 할 부분인 것 같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에 가면 관창과 관련된 설화가 아직도 생생히 그날을 말해주고 있다. 관창은 아버지 품일을 따라 백제 정벌을 위해 진군할 때 이곳 부용리를 지나갔다고 한다. 당시 신라군이 출정하면서 부용산 골짜기 ‘중갱이골’에서 야영을 했고, 아들 관창을 잃은 품일 장군이 개선하며 돌아올 때 역시 이곳을 지나면서 아들 관창의 명복을 비는 심정에서 ‘중갱이골’에 절을 짓고 아버지 품일과 아들 관창의 이름을 따서 품관사(品官寺)라 했다고 한다.   그 품관사가 있던 자리에는 금성사란 낯선 이름의 사찰이 있다. 지금의 금성사(錦城寺)는 해방후에 새롭게 개축됐다고 한다.   서라벌을 떠나 황산벌까지의 진군은 당시로써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오랜 행군으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고, 전쟁에서 승리를 이룩하는 데는 화랑들의 올곧은 정신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화랑정신이야말로 가장 본받아야 할 무형의 훌륭한 유산이라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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