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찾아서>>강동면 다산 2리(多山二里)   사과와 정구지, 토마토 생산   다산(多山)은 안강에서 68번 지방도를 따라 기계방면으로 가다가 기계천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펼쳐진 마을이다.   경주의 최북단인 단구리와 맞닿아 있고, 노당리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안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도음산(禱陰山 384m)을 사이에 두고 포항 연일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다산은 본래 조선 태종 15년(1669)에 확립한 8도 체제에 의해 안강현에 속한 ‘다질촌(多叱村·茶叱村)’이었으나 단구의 아래쪽이 되므로 ‘하단구’라고도 불렀으며 내(거랑)의 서쪽이 되므로 ‘내서’, 또는 한자 표기로 ‘천서(川西)’라고도 했다.   이 마을이 ‘다산’이 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강동면 다산리가 되면서부터다. 산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다산(多山)’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말골’, ‘삼괴정’, ‘오정’이 다산1리, ‘내서’, ‘진지’가 다산2리를 이루고 있다.   다산 2리는 전체 60가구 가운데 40여 가구가 여강이씨로 여강이씨의 집성촌이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사과와 정구지, 토마토, 한우 등을 기르고 있다.   사과는 5만여 평에서 7억여원, 정구지는 1만여평에서 2억원, 토마토의 경우 1만여평을 경작하고 있으나 마을에 젊은 사람들이 없어 안강 사람들이 임대해 농사짓고 있다고 한다. 한우는 마을전체에 100두 정도 기르고 있다. 주민총수는 150명으로 남자 72명, 여자 78이다.  낙산에서 거랑 따라 서쪽으로 옮겨와   내서 홍문관 검교를 지낸 여강인 지헌 이철명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마을이 내(기계천)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내서’, ‘천서(川西)’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거랑 물줄기가 변하여 마을이 거랑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또 본래 마을 동쪽의 뒤뫼산 너머 낙산에 있었는데 지대가 높고 물이 귀해서 서쪽으로 냇가를 따라 내려왔다고 ‘내서’라고 했다고도 한다.   낙산은 밭이었는데 논으로 만들 때 기와조각과 토기 등이 많아 나왔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산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이 식물원을 위하여’를 남기고 31세에 요절한 이경록 시인이 이 마을 출신이다. (47가구)   진지(陳地) 본래 방천 밑에 묵은 땅이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구어 이룩한 마을이다. 그래서 본래 묵을진(陳) ‘진지(陳地)’였으나 최근 보배진(珍) ‘진지(珍地)’로 바꾸었다고 한다. (13가구)   동제 매년 정월 보름날 지내고 있으나 당목은 없다. 기계천 냇가에 오래된 당나무가 있었으나 사라호 때 홍수로 떠내려가고 지금은 회관 옆에 제당을 짓고 향나무를 심어 당목으로 섬기고 있다. 최근에는 기계천 냇가에 울타리를 치고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와 당목을 세우고 제를 지냈었다고 한다.   귀향부 남기고 낙향한 지헌의 고고한 뜻   귀래정(歸來亭 민속자료 제94호) 조선 중종(中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검교를 지낸 바 있는 여주인 지헌 이철명(止軒 李哲明 1477~1523)을 추모하여 1755년에 그 후손들이 내서에 지은 정자이다. 건축구조가 육각형의 특이한 구조로 지어진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정자이다. 주심포를 중심으로 여섯 기둥을 세운 육각평면의 건축물로 앞부분은 마루를 놓았고, 뒷부분은 두개의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귀마루를 더 내어 여섯 모서리 모두 마루를 놓았으나 전면과 후면, 측면의 마루의 높이가 모두 다르게 해 출입이 원만하게 했다. 정자 주변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ㄷ’자로 판 연당이 있고, 출입문에서 오작교처럼 만든 나무다리를 거쳐 정자에 이르도록 되어있다. 출입에 있어 방심하지 말고 조신하게 행동하라는 뜻에서 좁게 설치된 이 나무다리를 지금은 시멘트로 다시 만들어 놓았다.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한국전통건축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귀래정은 본래 남쪽의 설창산(雪蒼山)과 서쪽의 설계천(雪溪川)의 눈설(雪)자에 착안하여, 여섯 모로 결정을 이루는 눈꽃을 이르는 육화정(六花亭)이라 이름 지었으나 기묘사화(1519년)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지헌의 고고한 뜻을 기려 1936년에 귀래정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지헌이 낙향할 때 지은 귀향부(歸鄕賦 1520년)와 수분명(守分銘 1521년) 등이 전하고 있다.   다음은 귀향부의 일부이다. ‘어찌하여 저 뭇 소인배들이 그만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켰는가? 소인배 몰아낼 힘 모자라고, 아무리 글 올려도 소용없네. 아! 어찌하여 구름이 밝은 해를 가려 푸른 하늘 바라보면 한없이 울고 싶소…’   가묘 여강이씨 천서문중의 가묘로 350년 전에 지었다.    과거시험 공부하던 ‘별당’   건지봉(蹇芝峰) 말골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반티(함지박)처럼 생겼다. 일대에서 제일 높은 이산은 마을 동쪽에 있다.    뒷방천 마을 지형이 뒤가 허술하여 인공으로 조성한 숲이다. 80~90년 전에 해송을 심었다고 한다.   고방축 옛날 물을 막는 물막이 돌 축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개간되어 방축이 없어졌다. 단구에서 숲이 이어져 있었으나 홍수로 물이 자주 범람해 방축을 쌓았으나 모두 유실되었다고 한다.  다질원(多叱院)터 다산에 있던 다질원의 터로 어딘지는 주민들도 모른다.   영지암(靈芝庵)터 건지봉 남쪽 중턱에   있는 영지암의 터.  그 후에 그곳에는 단림제 재실이 들어섰다. 안서당 350년 전에 세운 서당으로 마을 안쪽에 있다고 ‘안서당’이라고 했다고 한다. 70여 년 전에 헐리고 지금은 그 터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별당 과거시험을 공부하던 곳으로 뒤뫼산에 있다. 그 아래에 안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또 이곳은 다질원이 있었던 자리인지도 모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머슴들의 위로잔치 ‘서래술’   나생이 내서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대안골 건지봉 아래 행장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단림골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몇 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범의굴 옛날에 범이 살았다고 하는 바위굴로, 건지봉에 있다. 장정이 출입할 정도의 크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삿골 내서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고 한다.   진짓들 고방축 남쪽에 있는 들.    진짓보 진짓들 동북쪽에 있는 보.   귀보 내서 남쪽에 있는 물막이다.   은행나무 수 백 년 되는 나무가 있었으나 바로 아래 집이 있어 위험해 30년 전에 베어냈다. 황새가 앉아 똥을 누어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서래술 농번기를 지나고 7월 중순경에 마을에서 십시일반 각출하여 머슴들의 위로잔치를 베풀어주는 행사로 70년대 중반까지도 뒷방천 숲에서 이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진지들 농수로 확·포장   진지들이 큰데 농로가 비좁아 어려움이 많다.  이의 확·포장과 농수로 정비를 주민들은 바라고 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두환(74·전 경주시의원), 이춘환(61·POSCO 이사), 이영재(57 ·서울 공인회계사), 이규환(54·KBS 기획제작센타장), 이희영(45·아세아대 교수), 이승협(39 ·울산중부서 수사과장), 이승준(43·서울 공인회계사) 등이 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