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신라의 관문성   요즈음 따라 “우리는 성을 쌓지 말고 다른 목표로 이동한다. 성을 쌓는 자 망하고, 계속 이동하는 자는 살아 남을 것이다”라고 호령하였던 징기스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200여년전 기원전 3세기 무렵에 이 지구의 동쪽과 서쪽에 거대한 대규모 토목사업이 함께 진행되었다. 동쪽에서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았고, 서쪽에서는 로마에서 로마가도 건설이 한창이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보수하고 증축한 것까지 합하면 총 약 5천킬로미터 거리의 방위성벽이다. 로마제국이 기원전 3세기부터 약 500년 동안 건설한 로마가도의 총길이는 간선도로만해도 약 8만킬로미터이고 지선도로까지 합하면 15만킬로미터에 이르고, 터키, 이집트, 북아프리카, 유럽과 영국의 21세기 현재의 도로망과도 거의 비슷하다고 하니 놀랄 뿐이다.     로마도 도로망을 건설하면서 방위벽도 쌓았고, 진시황도 성을 쌓으면서도 통일천하의 각곳을 연결하는 도로망도 건설하였다. 그러나 도로와 방위성벽 중 어느것을 더 중요시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보면 두 제국의 통치철학 차이와 흥망의 역사가 다르게 갈리게 된다.     방위성벽은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지만, 도로망은 사람의 왕래를 촉진시킨다. 방어위주의 성벽인 만리장성 건설에 모든 국력을 쏟았던 진시황의 진나라는 불과 20여년 만에 멸망하였으나, 국가 방위를 위해 방벽도 쌓지만 사람의 몸 구석구석까지 혈관을 통해 싱싱한 피가 잘 돌아야 건강한 신체가 되듯이 로마제국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는 방어보다는 사람의 자유로운 왕래가 중요하고, 군사적 경제적 인재활용적 다양한 측면에서 도로인프라 구축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실천한 로마제국은 멸망은 커녕 오늘날 인류역사에 가장 찬란했던 문명을 남긴 제국 중의 하나로 그 발전된 제국의 역사를 남기고 있다.     징기스칸의 말대로 성을 쌓는데 국력을 소비한 진나라는 멸망하였고, 길을 닦고 사람과 사상의 자유로운 왕래를 통해 더욱 발전된 문화를 창출한 로마는 흥했다.     로마제국의 도로망 유적중 내가 직접 가본 곳은 약 10여년 전에 가보았던 폼페이 유적의 로마시대 도로망이다. 비가 올 때 진창이 빠지지 않도록 디딤돌도 만들어져 있고 마차의 수레바퀴가 지나는데도 지장이 없도록 세심한 설계가 되어있었음에 감탄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문화재 산책도중 자료에 의한 로마제국 도로망과 방위벽 유적중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곳은 현재 영국 스코틀랜드 지방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방벽과 목욕장 시설유적이다.     로마가도는 영국의 스코틀랜드 지방까지 건설되었고 그 최북단에 안토니누스 방벽과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쌓았다. 그 중에서도 하드리아누스 방벽에는 로마제국 최북단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한 목욕탕 시설도 남아있다.     요즈음 조류 인플루엔자(AI) 로 인해 닭고기 소비가 뚝떨어져 통닭집 사장님들이 울쌍이라고 한다. 닭의 병 중에서 흔히 알려진 ‘뉴캐슬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병의 발생지였던 북해변의 뉴캐슬에서 아이리시 해의 칼라일이라는 두 도시를 연결하는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사진만을 보면 우리 경주 모화의 관문성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하드리아누스 방벽 부근에 있는 로마시대 군인들을 위한 목욕장 유적을 보면 마치 우리 남산 장창지와 감은사지 금당터와 익산 미륵사지 금당터처럼 받침돌 위에 덮개를 놓고 그 위에 건축물을 지었던 것과 비슷한 건축구조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돌 기둥 위에 돌덮개와 목욕탕을 만들고 밑에 군불을 지피면 돌이 뜨거워지고 목욕물이 데워지는 재래식 보일러 구조인 것이다.     신라와 수도 경주에 있는 성벽 및 건축유적과 영국 스코틀랜드에 남아있는 로마시대 방위벽과 목욕장 유적을 비교해보면 동서고금을 초월한 인류의 지혜의 동일성과 유사성에 놀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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