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대제의 화랑흔적과 휴도왕과의 관계 中   눈송이가 제법 탐스럽게 보슬보슬 내린 반월성 남쪽 떨어진 나뭇잎 자리에 소복소복 희망이 꿈처럼 열리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역사문화도시로써의 서라벌 소망도 함께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아 발걸음이 가볍다.     오늘 하루, 온 세상을 포근히 감싸 안을 흰 눈이 우리네 허전한 가슴언저리까지도 따뜻한 화롯불 마냥 아낌없이 온기를 사방으로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때는 676년, 통일 완성 군주 문무대제는 당나라와의 마지막 전투인 기벌포(현 금강하구인 충남 서천군 장항읍 일대) 전투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함으로써 7~8년에 걸친 나·전쟁을 승리로 장식했다. 일찍이 고구려는 려·수 전쟁에서 승리하여,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적이 있었고, 수문제 조카 이세민이 세운 당나라와의 려·당 전쟁 역시 세계 전사에 길이 빛날 전공을 거두고, 결국 당 태종 이세민을 ‘애꾸눈 잭’으로 만들었던 기백에 찬 한민족이었다. 이 때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또 다시 승리함으로써 중국의 위정자들에게 동이족은 침공보다는 화친이 중요한 것임을 영원히 각인하게 하였던 것이다.     당을 물리친 문무대제는 몇 해 지나지 않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하였을 때도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게 한, 참으로 역사에 길이 빛날 성군이었다.     문무대제를 화장한 자리라고 알려져 있는 능지탑을 찾았다. 박물관을 나와 불국사 쪽으로 100여미터를 가면 경부고속도로 진입 사거리가 있다. 이곳을 지나 첫 번째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철길 건널목을 건너면 왼쪽에 능지탑이 있다. 여러 번에 걸친 발굴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원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불가사의의 탑이다. 탑 아래쪽 기단부에 새겨진 십이지신상도 몇 개는 사라져 그냥 새로운 대리석 민무늬로 마무리 하여 조금은 엉성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다. 복원된 탑 주변에 한 무더기의 석재가 모아져 있다. 탑을 복원하고 남은 석재라고 한다. 조선건조실적 세계 1위라고 매양 듣고 살아온 기자에겐, 이런 탑하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하는 실력으로 어떻게 그 같은 업적이 가능한지 놀라울 따름이다.     문무대제의 해중릉 봉안이 끝나자, 신라왕실에서는 대제의 치적을 비에 새겨 영원한 귀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왕릉을 바다 속에 조성한 탓으로 비를 세울만한 마땅한 장소가 문제였다. 그래서 서라벌 진산인 낭산 기슭에 의릉(擬陵)을 만들어 비를 세운 것이 아닌가 한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대제의 비가 발견된 것은 조선후기 1796년(정조 20)이었다.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발견된 문무대제의 비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냈던 홍양호(1724~1802년)에게 알려졌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편 실물은 전하지 않고 비문의 탁본만 현재 남아 있다. 그것도 청나라 금석학자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실려 있을 따름이다.     이후 다시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된 문무왕의 능비는 발견당시 심하게 마모가 되어 반수 이상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앞면에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적, 백제 평정 사실 등이고, 그리고 문무왕의 유언, 장례, 비명(碑銘) 등이 적혀져 있다.     이 비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아직까지도 역사학, 고고학, 언어학, 고미술학 등의 학자들의 설만 무성할 뿐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문제가 되는 비문의 글귀는 ‘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화관지후(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판독불가)지(枝)가 영이(英異)함을 담아 낼 수 있었다. 후(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하였다. 15대조 성한왕(成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下略)’이다.     여기서 ‘화관지후’, ‘투후’, ‘성한왕’이니 하는 생소한 글귀가 눈에 띈다. 문무대제의 출자(出自)를 명확히 밝혀 적은 것 같기는 한데, 일반인들에겐 무슨 난수표처럼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문자학회 김재섭씨는 문무대제의 출자를 다음의 일곱 단계로 주장하였는데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 기원전 2300년대   ② 진백(秦伯) : 기원전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 기원전 200년대   ④ 투후 : 기원전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 기원전 50년대   ⑥ 성한왕(成漢王) : 기원후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 기원후 660년대     위에 적은 것들은 지금은 무엇을 지칭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당대 서라벌인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비문에 새겨놓은 것일 것이다.     특히 통일을 완성한 문무대제의 비문에 조상을 밝혀 적는 것이기에 허투루 적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이 선다. 이것을 해석해보면,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목공,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흉노왕 : 김일제의 아버지), 투후는 김일제, 성한왕은 김일제의 4세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사람이 김알지라고 하는 설이 있다.     여기에서 투후 김일제는 중국 한서(漢書) 김일제전에 기록되어 있는 역사상 인물이다. 한무제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휴도(休屠)의 아들이 김일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삼한병합을 마치고, 당나라까지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한 문무대제가 스스로 ‘우리 조상은 흉노인(匈奴人) 김일제이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 된다. 그동안 연구자들은 우리나라 사서 편찬자들이 모화사상에 젖어, 자신의 뿌리를 중국과 억지로 연관시키려고 하였다는 것으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이라는 외세를 물리친 자주(自主)의 화신 문무대제가 자신의 뿌리를 중국이라고 하였던 것은 또 다른 역사의 비밀을 간직한 것은 아닐까?     혹자는 잃어버린 중원고토 회복을 염원하며, 아직도 굳건히 민족적 자주성을 확보하고 있는 민족은 5호 16국으로 유명한 5호가 유일하다고 한다.     또한 역사 이래로 중원에서 일어난 몇 안 돼는 한족(漢族) 국가들에게 항상 위헙의 대상이 되었던, 5호 중 흉노·선비·갈족을 우리 동이족과 같은 민족으로 보고, 저족·강족은 오늘날까지도 딜라이 라마의 영도하에 망명정부를 세워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티벳민족을 지칭한다고 한다.     역사란 주장만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헌에 나와 있는 것까지도 왜면 한다면 과연 올바른 역사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젠 모화사상이니 사대사상이니 하는 망령에서 벗어날 때가 도래하지 않았나 한다. 우리가 단일민족 환상에서 벗어나 저 중원을 말 달릴, 그 날을 생각하면서, 다시금 옷매무새를 고쳐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하겠다. 학계의 준열한 연구를 기대해 본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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