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를 지나 보문호반으로 가는 길은 얼음왕자가 휘몰아쳐, 이젠 계절의 언저리가 차가운 바람으로 온통 드날리고 있다. 단풍잎 하나가 애처로이 매달려 있는 스산한 가로수 길이 아직은 푸른 북천변 축구장 잔디밭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삼한을 통합하고 당나라까지 완전히 이 땅에서 축출하고, 진정한 민족의 대통합을 이룬 후 전쟁 화마의 중심에 섰던 백성들을 위무(慰撫)하고자, 무장사에 병장기를 묻고 다시는 금수강산에 전쟁을 없애겠다고 다짐하였던 분이 바로 신라 30대 문무대제이다.
조선시대 경주김씨 월성위 봉사손 완당 김정희선생도 여러 차례 무장사지를 찾아 무장사비 파편을 수습하였다고 하니, 그 중요성은 비단 비문의 글자체뿐만 아니라 무장사를 창건한 독특한 사찰 연기 설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장사지를 찾을 생각으로 나섰던 발걸음은 이미 덕동호를 넘고 있었고, 추령재의 백년찻집에서 풍기는 짙은 녹차 향기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찻집 주차장 옆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수많은 다기(茶器)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어, 서라벌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정갈한 차 한 잔이 시끌벅적한 도심의 찌든 머리를 속까지 맑게 하는 것 같다.
가만히 다향(茶香)에 심취해 있는 기자에게 어디선가 재촉의 음성이 들려온다.
가자! 추령재를 넘어 대종(大鐘)의 피울음 소리를 들으러 확 트인 동해 바다로 가자.
요즘은 추령을 관통한 터널을 이용하면 손쉽게 양북면 어일리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옛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추령을 넘는 길은 꼬불꼬불 구절양장이지만, 과거를 만나려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매우 유익한 드라이브 코스이다. 또 아는가, 20세기 초 사라진 한국산 호랑이라도 만날 수 있을는지…
꼬부랑 고갯길을 벗어나면 오른편으로 장항사지 이정표가 보이고, 연이어 기림사·골굴사를 알리는 정겨운 팻말이 오늘은 추위 때문인지 얼어붙어 있다. 제법 너른 들판이 나타난다. 벼 벤 그루터기에는 파아란 새싹이 몇 개 솟아 있을 뿐 무채색 일색이다.
신라 30대 문무대제(재위 661~681)는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소판 김서현의 딸, 곧 흥무대왕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이다. 서형산(서악) 오줌 설화로 유명한 여장부이기도 하다. 또한 이 오줌 설화는 고려를 창건한 태조 왕건의 건국설화로 재탄생되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를 보면 법민(法敏:문무대제)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라고 기록하여, 그의 인품이 통일을 완성한 군주로써 손색이 없었음을 알려 준다고 하겠다.
문무대제의 결단력을 높이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는 전 세계에 그 유례가 전무한 수중릉 부분이다.지금 우리가 대왕암이라고 부르는 봉길리 앞바다의 작은 돌섬이 문무대제를 화장하여 조성한 수중릉으로 보고 있다. 문무대제는 즉위 21년(681) 7월 1일에 56세(문무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를 일기로 붕어(崩御)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유언에 의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했다고 한다.
그 유언을 보면, ‘분묘(墳墓)란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기평(譏評:헐뜯는 평론)을 사책(史冊)에 남길 뿐이며, 헛되이 인력만 노비(勞費:품삯)하고 유혼을 오래 머물게 하지 못한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상통(傷痛:마음이 몹시 괴롭고 아프다)을 금치 못하겠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나의 즐겨 원하는 바가 아니다. 속광(임종) 후 10일에는 곧 고문(庫門) 외정(外庭)에서 서국(西國:인도)식에 의하여 불로 소장(燒葬:화장)할 것이다’라고 자신이 죽으면 거대한 고분을 만드는 수고로움에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고, 간소한 화장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구체적으로 지시를 하고 있다.
현금 나라의 지도자들이 화장(火葬)이 대세라고 온갖 매스컴을 동원하여, ‘좁은 땅덩어리 운운하며’ 새로운 장묘문화 정착을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렇게 외치는 지도자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조상묘는 전국 내로라하는 최고수 풍수지리 일인자를 동원하여, 삼정승 육판서가 난다는 명당을 쥐새끼처럼 물색하여, 새롭게 떡 하니 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 나라를 이끌 지도자들의 행태치고는 너무나 치졸하여 말 섞고 싶지 않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삼한통합의 주역인 문무대제의 나라 사랑과 비교하면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지금이라도 과감히 대세에 따르는 것이 더 이상의 손가락질을 피하는 방법이 아닐까. 무리한 희망사항을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나 자신이 무지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아 무지 씁쓰레하다.
대왕암은 문무대제의 수중릉으로 명명되기까지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원래 문무왕릉으로 알려진 괘릉(경주시 외동읍 소재, 현재 38대 원성왕릉으로 추정:삼국사기에는 화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을 조선후기(1712년경) 경주부윤 권이진은 인접한 곳에 숭복사가 있음에 비추어(삼국유사 기록 참조) 괘릉이 원성왕릉이라고 추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1955년 위당 정인보선생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설이 부정되었고, 1967년 5월 17일 모 일간신문사가 주관한 삼산오악조사단의 문무왕릉 발견보도가 있은 후 김씨 문중에서는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왕릉의 괘릉설을 철수했다고 한다.
그 후 1973년경 이곳 대왕암을 문무왕릉으로 받아 들여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조선전기 이전부터 이 바위섬을 대왕암으로 불렀다고 하니, 문헌기록의 미진한 부분은 민간전승에서 찾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장골(藏骨)이냐, 산골(散骨)이냐의 논란의 중심에 서 있지만 말이다.
봉길리 앞바다는 오늘도 검푸르게 대왕릉을 품고 있다. 한 떼의 갈매기만 나선형으로 호국용이 된 문무대제를 호위하는 것 같다. 감포 쪽 모래사장이 끝나는 곳에 몇 그루의 해송이 조그만 동산을 만들고 있다. 이곳이 해룡이 된 문무대제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신라삼보 중 두 가지 보물을 전하였다는 이견대가 있다.
31대 신문왕은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김흠돌의 난 등 귀족세력과의 힘겨루기로 지쳐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흠돌이 풍월주를 지낸 화랑 출신이면서 문무대제의 죽음까지도 비밀에 붙이고 난을 일으킨 것을 보면, 왕권 찬탈을 노린 것만은 사실로 여겨진다. 이에 문무대제의 황후 자의태후는 화랑을 폐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문왕은 새로운 청소년 학습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귀족들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신문왕은 이와 더불어 죽어서 동해의 해룡이 된 부왕 문무대제와의 만남을 기정사실로 서라벌에 회자(膾炙)되게 하여 유훈통치(遺訓統治)를 시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해룡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고, 신라삼보 중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이곳에서 얻었다고 하는 것에서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또한 부왕 문무대제가 초석을 놓았으나 완공하지 못한 진국사(鎭國寺) 건립을 완성하여, 감은사(感恩寺)라 바꿔 칭하면서 유훈통치를 이어나갔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으로 변한 문무대제가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흐트러진 민심을 통일군주 부왕 문무대제를 이용하여 수습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삼국통일기에 오면 신라는 화랑제도를 더욱 정비하여, 대업의 방패로 삼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할아버지 용춘공(13세 풍월주)과 아버지 춘추공(18세 풍월주 : 태종무열왕)이 모두 화랑 우두머리 풍월주를 엮임 하였는데, 그 직계인 문무대제만 화랑 무리와 무관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것 같다.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 각석에 20여명의 화랑의 이름이 예각되어 있다. 그 중 법민랑(法民郞)이란 이름도 새겨져 있다. 비록 한문은 다르지만(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모두 法敏으로 표기되어 있다) 혹시 문무대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 화랑무리에서 활약한 근거가 아닐까? 아직은 문헌증거 부족으로 가부(可否)를 판단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할 수 있으나, 문무대제와 화랑의 연관성을 밝혀 줄, 중요한 사실을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