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산 너머로 따스하게 솟아 오르는 겨울 아침 햇살에 더욱 선명해지는 그림자를 드리우는 괘릉 석상 앞에서 카메라를 멈추어 본다. 어떤 이들은 왕릉 주위에 있는 소나무도 왕릉쪽으로 고개를 숙여 가지를 드리운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빽빽한 노송 숲에서 소나무끼리 서로 좋은 햇살과 공간을 확보할려고 치열한 자리다툼을 하는데 왕릉쪽이나 신도 쪽으로는 허공에 장애물이 없으니 가지가 왕릉이나 신도 쪽으로 기울어지고 이 모습이 마치 소나무가 왕릉을 향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봐도 또 가고 싶고 또 보고 싶은 괘릉(전 원성왕릉) 입구 좌우의 화표석, 무인석, 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소나무와 어울어져 연출하는 왕릉의 전경이란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사적 제26호인 괘릉(전 원성왕릉)의 릉원구역 안에 있는 이 괘릉 석상 및 석주를 일괄하여 별도로 지난 2005년 1월 20일에 보물 1427호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역사성이나 문화예술측면에서 특별 보존관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수능성적이 발표되면서 전국이 떠들썩하다. 이맘때 쯤이면 교육제도 개편을 둘러싸고 교육당국과 학부모 그리고 학생과 교사 그리고 졸업생을 신입사원으로 받아들이는 재계간에 늘 다양한 이견이 상충하지만 뚜렷한 답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또 하늘 높을줄 모르고 치솟는 사교육비 특히 외국어 교육을 둘러싸고 ‘기러기 아빠’라는 신조어가 결코 낯설지가 않은 세상이다.   천년고도 경주라는 슬로건은 내걸리지만 막상 경주의 중상류층은 기회만 있으면 더 큰 도시로 떠날려고 하고 있고, 최근에 3대국책 사업에 따른 각종 신규시설 유치를 둘러싸고 도심과 동경주 서경주 남경주 북경주라는 소지역간의 지역발전에 대한 이해관계가 상충하여 서라벌이 자칫 분열되지 않을까하는 안타까움에 특별히 괘릉 서역인상을 찾고 싶어졌다.   지금으로부터 천여년 전만해도 이 서라벌땅에는 양남과 외동은 울산쪽이고, 안강은 포항쪽이고, 지금의 경주 구도심만 서라벌이라는 옹졸한 지도자는 없었다.   수 천만리 서역지방에서 당나라를 거쳐 통일신라의 수도 서라벌까지 유학이나 외교 또는 무역을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이 얼마나 많았으면 왕릉앞에 석인상까지 만들어졌을까?   당시 통일신라는 국제적인 무역과 외교무대에서 결코 뒤지지 않은 국제도시였고, 관리도 지방색을 따지지 않고 국적을 불문하고 두루 인재등용을 했기에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또 서라벌 땅에 찬란한 세계문화유산을 남기지 않았을까?   이 괘릉 서역인상의 모델인 서역인은 통일신라에 관리가 되려고 서라벌의 언어를 배웠을 것이고, 당시 서라벌의 통일신라 관리들 또한 중국어나 서역말(아랍어) 등 국제적인 외국어를 많이들 배웠을 것이다.   근래에 자꾸만 위축되어가는 경주 경제와 경주인들의 마음을 달래고 새로운 희망으로 국제적인 관광객을 다시 끌어 모으고 미래 비젼을 가꾸기 위해선 괘릉 석인상을 보면서 경주의 관계나 사회활동조직에서 지연 혈연 학연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인재등용이 절실하지 않을까하는 문화재 답사 소감을 적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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