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석굴암 진입로에 있는 마애비가 일제 당시 조선 총독부에 의해 무차별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위덕대 박물관 학술조사단(단장 김무생 교수)은 지난 10월 한달간 토함산 일대 유적을 답사중 석굴암 남쪽 진입로에 있는 가로 45cm, 세로 95cm의 마애비와 높이 각 8m, 6m인 2개의 바위에 새겨진 명문이 고의로 쪼아져 메워진 흔적 10여개를 발견했다고 최근 밝혔다.
이 대학 학술조사단은 또 석굴암 남쪽 약 1백m 지점에 있는 명문바위 한곳에서 찾아낸 또다른 마애비도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 제세당(濟世當), 현산석굴암 ··(峴山石屈庵(?) ··’등의 글자만 판독됐다고 덧붙였다.
학술조사단은 특히 이곳의 마애비는 현재까지 알려진 석굴암과 관련한 유일한 금석문으로 신라 경덕왕때 석굴암이 창건된 이래 우리 손으로 보존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했다.
이 마애비는 원래 4행 약 40자의 글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연호부분과 본문이 철저히 지워져 있다.
위덕대 김무생 학술조사단장은 “1907년까지 엄연히 승려 1∼2명이 있었고, 석가탄신일에는 수천명의 신도들이 운집했던 석굴암을 당시 경주 우체부가 마치 지하에서나 찾아낸 것처럼 조작하고 복원공사결과(1차공사 1913∼15년)를 총독정치의 우월함과 연관시켜 크게 선전하였던 일본 당국이 부근의 바위명문을 쪼아 내면서까지 이를 기정사실화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김 조사단장은 또 "쪼아버린 자국 마멸이 오래된 점, 정밀하게 쪼아낸 점, 자국마저 찾기 힘든 점, 석공을 일본인만 고용한 점, 멀리서 보이지 않는 글자까지 지운점, 복원공사시 일본인이 진입로 공사를 한점 등을 들어 기록인멸 행위의 주역이 조선 총독독부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김 단장은 특히 "명문 훼손흔적이 세로 60∼132㎝에 이를 만큼 길기 때문에 단순히 이름 석자만 새겼던 것이 아니고 상당한 내용의 명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이와관련, 이 대학 박물관 박홍국 학예연구실장도 “명문내요에 따라 토함산(土含山)이 한때 현산(峴山)으로도 불려진 점, 현재 진입로가 옛날 참배로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점 등 조선총독부가 석굴암에 남긴 역사인멸의 생생한 증거자료를 확보한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면서 이번 마애비 발견에 대해 이같이 평가했다.
한편 일본은 본존불과 11면 관세음보살 중간에 있던 5층 대리석보탑(大理石寶塔)과 보살상 2구를 훔쳐가고 당시 석굴공사 때에도 천정돌에 “日本”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는 등 만행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여져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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