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에 대한 나의 화두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8세기 중엽 신라인들은 왜 그곳에 누구를 위해 동지 일출과 마주보고 항마촉지인 대불을 점정시켜야 했는가? 전방과 후원을 연결하는 팔각 앙련과 복련 기둥은 어디서부터 왔으며 40개의 조상들로 구성된 짜이띠야굴(탑원예배굴)은 어떤 경전의 사상을 담고 있는가?   ’ 나는 이러한 의문점들을 풀기 위해 인도에서 토함산까지의 ‘석굴로드 탐방’ 을 겨울과 여름을 번갈아 10여년 전부터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2006년 8월에는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정병모 교수팀이 기획한 중국 산서지방의 답사여행에 스스로 결심하고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에는 대동의 운강석굴,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과 공현석굴이 포함되어 이미 답사한 곳도 있었지만, 아직 보지 못한 새로운 곳도 있어 마음은 설레고 있었습니다.   석굴암의 팔각 앙련기둥을 운강 석굴의 제 9, 10 쌍굴의 전실에서 발견하였습니다. 물론 길이와 지름은 같지 않지만 같은 형식, 같은 양식의 문양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하고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안경을 벗어 알을 닦고 다시 카메라의 초점을 앙련과 복련 부분에 맞춰 다시 기둥면을 관찰하였습니다.   틀림없는 팔각기둥이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반대편 공간의 대칭적 측면을 보았지만 10굴 쪽에는 기둥이 있어 받쳐야 할 윗부분이 쇠락하고 없었습니다. 돌아와서 9·10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니 내가 이 팔각 기둥을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고,   북위 효문제를 위하여 후실 중심에 불전조각 탑주를 세우고 시계방향으로 예배자가 돌 수 있게끔 통로를 뚫었음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하여 석굴암의 팔각 앙련과 복련 기둥들도 누구를 위한 정토장엄이었는가를 천착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용문석굴의 간경사동 나한상들은 7세기 말에는 선종 밀교사상이 바람 불어왔다는 증거라도 할 것 같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전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정교수의 세심한 준비로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다행이었습니다. 석굴암과 비교하면 정적이고 명상적인 공통점도 있었지만 석굴암 나한들이 더 인도적이고 간경사동 나한들이 더 서역적이 아닌가 하는 차별성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태원에서는 몇 년 전에 본 진사를 보지 않는 대신, 개인적으로 정교수의 허락을 받아 천룡산 석굴을 쫒기듯 허둥대며, 보았다기보다는 헤매고 돌아왔습니다. 잠시 조직을 이탈하여 별미를 혼자 서둘러 먹다 체하고 말았으니, 빨리 다시 되돌아와야 체한 배탈이 가라앉을 것 같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현석굴에서 황후예불도에 푹 빠져 감시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숨바꼭질을 해 가며 사진을 찍다가 호된 훈계를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작은 사건들은 내 마음속에 약간의 아름다운 상처로 아로새겨질 것입니다. 지난 여름 강행군의 산서성 답사를 다시금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특히 이번 답사는 중국 석굴조각을 통해서 우리나라 불교미술사의 교류적 측면을 깊이있게 고민하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석 우 일신라역사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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