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그분을 내 안의 스승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분은 경주 토함산 중턱에 살고 있으며 무심과 묵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언제부터 이름이 ‘오동수’ 라 불리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이름 자 중 ‘수(水)’ 그 한 자만으로 스승이라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물의 모습 자체는 자연의 질서와 법칙이지만 그로 통해 큰 깨달음을 주면 스승이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것은 숨쉬는 일 다음으로 물이 아닌가. 요즘은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물이 귀하다. 그래서인지 깨끗한 물을 갈망하여 약수터를 찾는 이가 많아지고 있다.
우리 집 부근인 ‘오동수’에도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언제나 골고루 사랑을 베풀어주는 모습을 만나러 온다. 산 중턱을 뚫고 얼굴을 내밀며 그냥 자신을 내어주는 한결같은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상쾌해 진다.
운동 삼아 왔다가 물이나 한모금 먹고 싶을 뿐이라면 나도 우둔한 속물이라고 스승이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이 나이가 되도록 물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제나 나는 고개 숙여 마음을 가다듬고 스승의 가르침을 묵묵히 가슴에 새기고 돌아온다.
나도 물처럼 흐르고 싶다. 계곡을 타고 흐르고 싶다. 가끔은 웅덩이에 갇히면서 잠시 쉴 때도 있겠지만 억지로 그 곳을 벗어나려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리라. 기다리면 동료들이 합세하고, 역량이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넘쳐 탈출할 것이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강태공처럼 바늘 없는 낚시로 세월을 낚으면 어떠랴? 바위틈에 뿌리박힌 나무들, 숲 속에서 노래하는 새들, 인적을 피해 심야에 활동하는 산짐승에게까지 골고루 정을 나눠 주고 싶다. 그들은 물을 모으는 큰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세모난 그릇에 담으면 세모난 모습으로,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근 모습으로,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유연하게 살고 싶다. 가다가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법을 안다. 바위 같은 덩어리가 겹겹이 막혀도 살짝 살짝 돌아 유유히 떠난다. 물은 우회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사건건 시비와 갈등을 일으키며 지치고 힘든 인생길에서 물길이 주는 교훈은 얼마나 훌륭한가.
순리와 여유는 능력 있는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도 가르쳐 준다. 순리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소극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절제와 마음의 평화가 유지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한 삶의 모습이다.
나는 늘 자신을 낮추고 낮은 곳으로 흐르고 싶다. 물의 성분이나 능력이나 역할을 보면 뽐낼 만도 하지만, 낮은 곳으로 임해야 강물이 된다. 말없이 굽이쳐 흐르는 강 유역에 도시가 형성되고 번영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시냇물 소리는 찰랑거리고 나뭇가지 하나라도 숨길 수 없지만, 강물은 넉넉히 포용하고 바다로 흐른다. 바다는 생명의 근원이다. 온갖 잡다한 것이 다 들어와도 모두 수용하여 세정하는 염분을 갖고 있다. 그래서 예수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가르쳤다. 바다를 바라보면 세상의 오욕칠정을 다 잠재우고 넓은 가슴으로 파도치는 노래가 들린다.
오늘도 ‘오동수’ 물 한 모금이 내 안에 바다를 이루는 스승이 되었다.
약력>>1947년 경주 동방 출생 경주대학교 경영학부 국제통상학과 졸업 “수필과 비평”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경주문협, 경북문협, 한국문협 회원 남경주새마을금고 이사장 역임 현, 문화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현, 경주문예대학 동창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