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한 어깨가 뜨거운 국물을 향해 바삐 종종 걸음 치는 엄동설한이 찾아왔다. 이때쯤이면 화롯불 가장자리로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입가에 검정 숯 칠 듬뿍 칠한 채 누런 이빨로 깔깔대며 온 집이 떠나갈듯이 웃던 천국 바로 그것이었다.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행복감이 온 고을의 굴뚝 연기를 하얗게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하였던 지상낙원이 서라벌 곳곳에 묻어나던 때이기도 하다.
아침에 만난 조간신문은 자신이 상류층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2퍼센트에도 못 미치고, 약 50퍼센트 가까운 사람들이 하류층이라고 생각한다는 어두운 기사가 눈길을 끈다. 사실유무를 떠나 매서운 칼바람 마냥 우리네 살림살이가 갈수록 피폐해지는 것 같아 발걸음이 무겁다. 상황이 이런대도 모 다단계 사건에 연루된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작태를 보면, 이 땅에 왜 화랑국선 정신이 다시 되살아나야만 하는 지를 절실히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신라 26대 진평왕 시절 수나라로 구법여행을 다녀온 원광법사는 가슬갑(嘉瑟岬 : 운문사 동쪽 9,000보쯤 되는 곳에 가서현 혹은 가슬현이 있고 이 고개 북쪽 끝에 있는 절터가 바로 여기다. ‘삼국유사’의해 원광의 서방유학조)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사량부 선비 귀산(貴山)은 같은 동네 추항을 벗으로 삼아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점잖은 선비들을 상대로 사귀기로 가약하지만 먼저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잘 가지지 않으면 옥을 가져올 염려가 있는지라 어찌 어진 분 곁에 가서 도를 배우지 않을 것인가”하면서 원광법사의 처소로 찾아가서 말하기를, “속세의 선비로서 어리석고 유치하여 아는 지식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한 말씀 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하였다. 이에 원광법사는 자세를 바로하고 말하기를, “불교에는 보살 계명이 있어 그것은 열 가지로 되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아마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속세의 다섯 가지 계명이 있다”하면서 그 다섯 가지 계명을 말하여 주었다.
첫째, 事君以忠(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일이다.) 둘째, 事親以孝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다) 셋째, 交友以信 (친구와 사귀어 신의가 있음이다) 넷째, 臨戰無退(싸움에 다다라서는 물러 섬이 없는 것이다) 다섯째, 殺生有擇(생물을 죽이는 데는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계명을 받은 귀산과 추항은 다시 원광법사에게 질문을 하였다. “다른 것은 다 이미 잘 알겠사오나 생물을 죽이는 데는 가려서 하라는 말씀은 특히 깨닫지 못하겠습니다”하니, 원광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재 올리는 날과 봄 여름 철에 살생을 않음은 때를 가리는 것을 말함이요,
부리는 짐승을 죽이지 않음은 말, 소, 닭, 개를 말함이요, 사소한 것들을 죽이지 않음은 한 점 고기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함이니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 역시 그 소용되는 것만 하고 많은 살생을 필요로 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계명이다”라고 상세하게 가르침을 주었다. 이에 귀산과 추항은 평생토록 좌우명을 삼기를 맹세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여기에서 귀산과 추항을 선비라고 칭하였지, 화랑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사정을 보면 화랑국선이라고 보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신라는 국초부터 내려오는 청소년 수련단체가 있었고, 이것을 23대 법흥왕대 1세 풍월주 위화랑으로부터 그의 이름을 따서 화랑이라 하였다고 화랑세기는 이야기 하고 있다.
물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24대 진흥왕대에 와서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진흥왕이 법흥왕의 아우 입종갈문왕의 아들이니, 거의 같은 시대에 화랑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26대 진평왕대가 되면 화랑을 국가가 직접 육성하여 그 규모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이 시대에 원광법사를 찾아가 세속오계를 받았다는 것만 보아도 화랑출신이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지금 세상에는 화랑들의 세속오계와 같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규범이 사라진지가 오래이다. 또한 원광법사 같은 나라의 큰 스승 역시 그 존재가 없어진지 무척 오래인 것 같다. 이제라도 화랑들의 사상을 찾고 집대성하여, 자라나는 후세들에게나마 올바른 정신함양을 할 수 있는 규범을 만들어 줄 몫이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삼국유사에 그 본보기가 되는 사연이 있어 소개한다. 다 함께 음미하여 현금과 같은 지도층의 후안무치(厚顔無恥)를 질타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중 혜숙은 원래 화랑 호세랑(울산시 언양읍 천전리 각석에 이름이 보인다)의 무리에 있었다.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어 황권(화랑들의 명부)에서도 사라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안강현 적선촌에 숨어 산지가 20여년이 되었을 때, 국선(國仙:화랑의 우두머리) 구참공이 사냥을 하러 적선촌으로 왔다. 이에 혜숙은 구참공과 함께 사냥을 하여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면서 즐겁게 배부르도록 먹었다.
고기를 다 먹은 후 혜숙은 구참공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지금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여기 있으니 좀 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구참공은 반가워하며 좋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혜숙은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놓아 바치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이것을 본 구참공이 깜짝 놀라 하는 말이, “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하면서 화를 내었다.
혜숙은 꾸짖듯이 구참공을 바라보며,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물건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겨 해서 짐승을 죽여 자기 몸만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무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옷을 뿌리치며 가버렸다. 구참공은 몹시 부끄러워하면서 이 사실을 궁중에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진평왕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였다. 혜숙을 찾던 사자는 여자의 침상에 누워 자고 있는 혜숙을 발견하고는 더럽게 여겨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자는 다시 혜숙을 만났는데, 혜숙은 태연하게 시주(施主)집에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화랑 혜숙이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 무엇이고,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슨 말이었는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그는 비록 화랑무리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화랑들이 지켜야만 하는 규범은 한 치의 게으름도 없이 몸소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서라벌 천년수도에는 가야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이 분명하게 각인된 올곧은 정신세계가 존재하였고, 그들을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한 곳으로 매진케 하여 삼한을 병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어느 승리의 역사서에나 항상 정신적 승리만이 진정한 승리라고 우리는 배우고 익혀 왔다. 아직은 늦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더 이상의 추태를 버리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다 함께 두 손을 마주 잡고, 다시 한번 새로운 서라벌 패러다임의 일원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춥다, 이 추운 바람이 지나가고 훈풍이 봄바람과 날개 되어 서라벌을 감싸 안았으면 좋겠다. 박진환 프리랜서기자<pjw32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