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조리는 경주에서 4번 국도를 따라 감포 방향으로 가다가 전촌삼거리 가기 전에 위치한 마을이다. 당산제를 지내는 당사나무가 있어 ‘당삿들’로 불리는 산간지로서는 제법 넓은 들을 지니고 있고, 이 들을 중심으로 산기슭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촌락이 펼쳐져 있는 정겨운 마을이다. 짙푸른 동해바다가 저만치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전촌과 나정, 대본에 해안을 내어주고 그 안 자리에 넓은 들을 차지하고 있다. 마을 주위의 산모양이 ‘八’자, ‘助’자 형을 이루고 있어 ‘팔조(八助)’라고 했다고 한다.     양지마을과 매곡마을 사이에 ‘八자’형의 산이 있었으나 10년 전 이 자리에 감포주유소가 들어서면서 산을 허물었다.   그리고 연대산 준령이 뻗어 내리면서 만들어낸 등성이들이 마치 ‘助’자 형상을 이루고 있다. 양지마을에서 연대산을 바라보면 산 모양이 흡사 ‘助’자를 이루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마을뒷산 모양이 8자(八字)처럼 생겼으며, 여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뜻을 더하여 ‘팔조(八助)’라고 했다고도 한다. ‘팔조포(八助浦)’라고도 한다.   밀양박씨(40가구), 진주하씨(15가구), 남원양씨(12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매곡’, ‘양지’, ‘음지’, ‘홍덕’, ‘수젯골’ 등 5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을 따라죽은 말의 충직함 기려     양지(陽地) 팔조리의 중심마을로 마을이 남쪽을 향해있어 늘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온다고 ‘양지마을’이라고 한다. 남원양씨 집성촌으로 마을회관이 있는 마을이다. (18가구)   음지(陰地) 양지마을 맞은편 음지쪽에 위치하여 ‘음지’라고 부르며,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서촌’(西村)이라고도 불린다. 남쪽과 서쪽을 산이 가리고 있어 하루 종일 있어도 햇살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다. 진주하씨의 집성촌이다. (33가구)   수제 가뭄이 들어 비가오지 않을 때 기우제를 지낸 곳으로 ‘무제’, ‘수제골’, ‘수젯골’이라고도 한다. 연대산 중턱에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양지마을 남쪽 연대산 기슭에 있는 마을이다. (22가구)   매곡(梅谷)은 옛날 매화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매골’, ‘매갈’, ‘매가리’라고도 부른다.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지금은 매화나무가 없다. 양지마을 동편 산 밑에 있는 마을로 감포주유소 뒤쪽 안 골짜기에 있다. (19가구)   홍덕(洪德)은 임진왜란 때 창의의사 김자은 장군의 비문과 무덤이 있는 곳으로 그때 장군의 말이 주인을 따라죽었다고 한다. 그 말의 색깔이 홍색이어서 말을 충직함을 기리기 위해 마을이름을 ‘홍마(紅馬)’라고 하다가, 뒤에 ‘홍덕(紅德)’, ‘홍두테’라고 바꾸어 불렀다. 이 마을에 홍씨(洪氏)와 정씨(鄭氏)가 살았다고 하여 ‘홍정(洪鄭)테’라고 불리기도 했다. 양지마을 북쪽에 삿갓봉 뒤쪽에 있는 마을이다. (7가구)     불타버린 덕산사와 헐린 열녀각     덕산사(德山祠) 터 숭의공(崇義公) 덕엄 김자은(德嚴 金自隱)을 향사하던 곳으로 조선 순조 28년(1828)에 지었으나 고종 5년(1868)에 소실되었다. 김자은의 자(字)는 경돈(敬豚)이고 본관은 경주(慶州)로 1568년에 태어나, 1587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선무원종공일등(宣武原從功一等)에 녹훈되고, 훈련주부(訓練主簿)를 지냈다. 현종 9년(1668)에는 자헌대부 병조판서(資憲大夫 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남원양씨 제단 동편에 있다.   연암정(蓮庵亭) 음지마을 입구에 있는 진주하씨(晋州河氏)의 정자로, 첨정(僉正) 하해채(河海債)의 학덕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세웠다. 70여 년 전에 지었다.   독립운동가 정내영(1900~1960) 홍덕마을 출신으로 서울 휘문중학교에 다니던 정내영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4월 송두환(宋斗煥)·김종철(金鍾喆)·최해규(崔海奎)·정동석(鄭東錫)·김봉규(金鳳奎)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에 적극 활동하고, 일본고등경찰관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1924년 11월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중국을 비밀리에 내왕하면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열녀각 경주김씨 집안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양지마을에 세워졌던 열녀각으로 해방 후에도 중수하여 보존하여 왔으나 최근 그 후손들이 허물었다고 한다.   남원양씨 제단 남원양씨들이 조상을 추모하여 양지마을에 세운 제단이다.     곶감처럼 생긴 꼬감돌배기     팔조리 성터 음지의 북편에 있는 옛 성의 터로, 앞에 횃채(해자)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밭이 되었다. 주춧돌도 남아 있고, 성문 터가 3군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도자기가 많이 나오고 붉은색, 노랑, 재색 등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연대산(連臺山) 팔조리와 나정리, 대본리에 걸쳐 있는 높이 223m의 산으로 봉우리의 모양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연대산’이라 부르고 그 꼭대기를 ‘연대배기’라고 한다. 또 옛날에 이 일대가 해일이 덮쳐 이 산 꼭대기에 겨우 연(날리는 연) 하나 놓을 자리만 두고 다 물에 잠겼다고 해서 ‘연대산’, ‘연대배기’라고 했다고도 한다.    삿갓봉 높이 180m의 산으로 봉우리가 마치 삿갓처럼 생겼으며, 또 옛날 물난리가 났을 때 바닷물이 차고 삿갓만큼만 남았다고 해서 ‘삿갓봉’이라고 했다고 한다. 양지마을 뒷산이며 홍덕 앞산이다.   꼬감돌배기 동글동글한 바위들이 포개어진 모양새가 꼭 곶감을 꼬쟁이에 끼워 놓은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홍덕마을 입구 건너편 도랑가 언덕배기에 있다.    감남골 음지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감나무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백정골 산성에 주둔한 군사를 위해 소를 잡아 고기를 공급하였던 곳이다. 6.25때는 빨치산의 근거지로 그들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끄칫골 홍덕 북쪽에 있는 긴 골짜기로, ‘거치곡(巨致谷)’이라고도 한다. 팔조에서 가장 긴 골짜기라고 한다.  끄칫골 논 끄칫골에 있는 논. 끄칫골 못 끄칫골에 있는 못. 끄칫골 보 끄칫골에 있는 보.     무제(기우제)를 지내던 무젯등     당미기 수젯골의 남쪽에서 대본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당(堂)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최근까지 큰 노송이 당나무로 서 있었으나 벼락 맞고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전촌, 나정 등 인근 어민들이 무당을 데려와 이곳에 있는 큰 소나무에 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연대산 정상부에 있다.    당삿들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나무가 있는 들로, 양지말 앞에 있다.   등만등 매곡의 동쪽에 있는 등성이로 현재 건축을 하기위해 토목공사 중에 있는 등성이다.   말밋당등 지형이 말 엉덩이 같이 생긴 등성이로, 수젯골 동남쪽에 있다. 무밋등이라고도 한다.   무젯등 날이 가물 때면 무제(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등성이로, 수젯골의 동남쪽에 있다. 무짓등이라고도 한다.   니골 음지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 기복골 장산골 등 골짜기가 4개가 있다고 하여 ‘니골(4골)’이라고 했다.   새창골 음지의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니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들 사이에 창처럼 쏙 내밀고 있어 사이에 내민 창이라는 뜻에서 ‘새창골’이라고 불렀다.    선돌바우 연대산 기슭에 있는 길쭉하게 선바위로 기도하여 아들 낳은 사람이 많은 영검한 바위이다.   마석(바위) 양지마을에 사는 처녀가 바람이 잘 난다고해서 방책으로 두께 1자 높이 6자의 바위를 세웠는데 사라호 태풍 때 묻혔다고 한다.     주발의 따까리처럼 생긴 ‘딱감등’     성고개 수젯골 서남쪽에서 양북면 어일로 넘어가는 고개로, 옛날 석성(石城)의 터가 있어 ‘성고개’라 부른다. 성현(城峴)이라고도 한다.   양지말 뒷등 양지말 뒤쪽에 있는 등성이로, 모양이 마치 주발의 따까리(뚜껑)처럼 생겼다고 하여 ‘딱감등’이라고도 한다.   여방아 물레방아간이 있었던 들이다. 이곳에는 고암(高岩), 호암(狐岩)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양지말 서쪽에 있다.     장산골 음지마을 뒤쪽에 있는 긴 골짜기     초막골 말미등의 맞은편 골짜기로 말 먹이에 해당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신라 때 군마의 말먹이를 했던 초막이 있었던 곳이라고도 한다. 매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골짝 수젯골의 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이름만 그렇지 실제로는 별로 안 크다고 한다.   소랑산 쇠서랑이처럼 생긴 산으로 음지마을 북쪽산이다. 이 산 정상부에 독립운동가 연일인 정내영의 묘가 있다.   횃채 옛날 성(城)의 해자가 있었던 자리로, 지금은 밭이 되어 있는데 성고개(성곳) 밑에 있는 밭이다.     마을주민들 주로 건설현장에 나가 돈벌이     이 마을은 벼농사와 감자, 고추, 한우 100여두를 기르고 있고, 마을주민들이 주로 건설현장에 나가 돈벌이를 하고 있다고 한다. 감자는 감포에서 제일 많이 재배하고 있으며 9천평에 2천만원, 고추는 4천여평에서 3천만원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그리고 부인들이 산나물채취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팔조리는 한 때 150여 호까지 살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 100여 가구 23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감포읍에서는 소재지를 제외하고는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한다. 이마을 최고령자는 김무희(94·자오댁) 할머니로 서촌에 살고 있다.     5개 마을을 한 마을로 묶어 놓으니까 다른 마을에 비해 예산이 부족하게 배당되어 진입로, 농수로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한다. 홍덕마을 진입로의 경우 차량이 겨우 들어갈 지경이었다. 진입로와 농수로 확장이 주민들의 바람이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을희(82·효부상 수상자), 박만봉(79·감포읍유림회장), 박순용(60·전 육군대령), 김준달(60·부산 사업), 박용기(43·용인한의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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