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숲이 많아-‘대숲’-‘죽전(竹田)’ 40년 만에 아기울음소리
경주시에서 가장 작은 마을은 과연 어딜까? 양북면에서도 가장 오지마을로 꼽히는 죽전리이다. 대숲, 남전, 새모기, 불당 등 4개의 산골마을로 이루어진 죽전은 17가구에 주민 28명(남자 7명, 여자 21명)이 사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주민들은 ‘미니마을’이라며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이 마을에 최근 경사가 났다. 40년간 애기울음소리가 끊어졌던 이 마을에 아기가 태어난 것이다.
유원재(39)씨가 지난해 8월 베트남부인 얻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은 것이다.
또 박봉훈(38)씨도 역시 베트남부인을 얻어 현재 임신 중에 있다. 이미 초 고령화 되어버린 농촌마을이 쇄락해가는 사정이야 어딜 가나 비슷하겠지만, 장날이라야 겨우 버스가 들어오는 해발 220m의 산중 오지마을인 죽전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이곳에서 40년 만에 아기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는 것은 꿈과 희망의! 새 기운을 느끼게 하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디 있겠는가?
17가구 28명 가장 작은 마을
죽전을 가기 위해 경주에서 국도 4호선을 따라 보문관광단지를 거쳐 꼬불꼬불 덕동호수를 따라 난 길을 돌아들었을 때, 추령재를 물들인 가을단풍이 한껏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우리나라 4대 단풍절경의 하나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산색고운 추령재를 뒤로 하고 어일삼거리에서 문무왕수중릉과 감은사로 이어지는 오른쪽 길을 가다보면 들판 가운데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두산, 송전, 죽전으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두산리와 송전리를 지나 산 고개를 넘어 5km 지점에 대수저수지를 만난다. 여기가 죽전리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대나무 숲이 우리를 반겼다. 그래서 ‘대숲’, ‘대숲마을’이라고 부르던게 ‘竹田’으로 한자표기 되었을 것이다.
입실에서 효동을 거쳐 이 마을로 가는 길도 있고, 양남 석읍마을 뒷산을 넘어 가는 길도 있다. 경주시청 기준 30km 42분 거리에 있다.
무늬만 양남인 효동1리 1반
양북면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죽전은 양남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효동1리 1반과는 길을 사이에 두고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진입로에 해당하는 이 길이 양북면과 양남면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
길 아래 남쪽은 효동1리 1반이고 그 북쪽은 죽전이다. 이곳은 효동리 본동과는 3km나 떨어져 있어 마을회관, 경로당도 죽전에 같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 5가구(11명, 남5·여6)이다. 시장도 어일장에 가고 모든 생활권이 양북이다.
행정당국의 전달사항도 양북에서 먼저 전달 받는다. 가로등 설치, 농로개설 등도 양남에서는 신경조차 안 쓴다고 한다.
외딴곳에 사는 것도 억울한데 늘 괄시만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주민들은 마을이 양북면 죽전리로 편입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것은 죽전주민들도 마찬가지다. 무늬만 양남이지 내용은 이미 죽전마을과 한 가족이었다. 아예 다른 지자체도 아니고 같은 경주시 관할이니 행정에서 이것은 좀 조정해서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해 주어야겠다.
죽전은 벼농사와 산나물에 생계를 의존하고 있다. 취나물, 두릅, 참나물, 미역추 등 나물이 보드랍고 맛있어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산이 짙어져서 나물이 많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분출(94·동산댁)할머니로 19살에 동쪽에서 시집왔다고 ‘동산댁’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박학 이장의 모친인 김 할머니는 아직도 밥 한 그릇씩 거뜬하게 비우고, 술도 1~2잔씩 잘 하신다. 고기는 소고기만 자신다는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김순연·65)가 잘해줘서 건강하다. 며느리에게 고맙다”고 아들, 며느리 자랑에 열중이다.
아직도 대숲 우거져
대숲은 대나무밭이 있는 마을이라 ‘대숲’, ‘대숲말’, ‘죽전(竹田)’이라 불렀다.
또 마을 밑에 대수못이 있으므로 ‘죽연(竹淵)’이라 부른다. 남전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4가구) 남전(南田, 藍田)은 마을의 남쪽 넓은 밭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남전(南田)’이라 하였다. 또는 쪽밭이 있던 곳에 마을을 세웠다고 하여 ‘쪽밭’ 혹은 ‘남전(藍田)’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죽전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무안박씨, 기계유씨의 집성촌이었다. (12가구)
새모기 산의 형세가 새 모가지 같아 ‘쇠모기’, ‘조항(鳥項)’이라고도 하며, 죽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15가구정도 살았으나 지금은 마을이 없고 사찰이 들어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김해김씨 집성촌이었다.불당(佛堂) 죽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불당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 1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임란의사 본거지(?) 범우굴
범이굴과 범바위 범우골에는 범이 살았다는 굴이 있는 범바위가 있다. 큰 바위들이 군집한 높이 20m, 폭 50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산이었다.
그 밑에 있는 굴에 범이 살았다고 하며 범 발자국을 보았다고 한다. 바위산 동북편에 장정 30여명이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얕은 굴이 있고, 정동쪽 아래에는 입구는 좁지만 사다리타고 안으로 들어가면 장정 40~50명 정도는 앉을 만한 제법 넓은 굴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입구가 막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일대가 왜적들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며 의병활동이 왕성했던 지역이다. 특히 우산전투와 이견대전투 등 죽전 인근에서 의병들의 전투가 빈번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어쩌면 이곳이 임진왜란 때 우산전투에서 의병들이 대승을 거두었던 본거지가 아닐까? 범바위에 올라서 동쪽으로 내려다보았다. 저 아래 대수못에서부터 이 골짜기로 들어오는 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못할 정도로 좋은 전망을 가진 곳이다.
동해에서 외동 입실을 통해 경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두산과 송전을 거쳐 이곳 죽전을 지나 효동으로 동대산을 넘어야했다. 따라서 이곳은 동해를 통해 들어온 왜적들이 경주로 침입하는 주요 통로였으며 이를 저지하기 위한 천혜의 요새라는 점을 알 수 있었다.
비둘기굴 비둘기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비둘기굴이라고 한다. 굴안골 계곡의 한쪽 바위벼랑에 언덕의 10m 높이에 너비 5m, 깊이 3m에 이르는 자연굴이 형성되어 있는데 비둘기들이 살기에 알맞은 굴이었다.
마을 이주시킨 눈물 흘리는 ‘바위’
눈물바우 바위에서 물이 떨어져 마치 눈물을 흘리는 형국이라고 하여 ‘눈물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 본래 마을이 있었는데 눈물바위 때문에 젊은 사람이 자꾸 죽어서 지금 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구터’라고 부른다. 초가삼간 집체만한 바위로 남전마을 북편 개울가 언덕배기에 있다.
선바우 마을 뒤 조항산 기슭에 우뚝 선 바위이다.
탕건바우 갓 속에 쓰는 탕건처럼 생겼다. 효동과 경계에 있다.
개바위 개처럼 생겨
병풍바위 옛날에 절터 조항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새모기산 양북면의 죽전리와 양남면의 효동리에 걸쳐 있는 높이 595m의 산, ‘조항산(鳥項山)’, ‘조양산’, ‘북두산’이라고도 한다.
새모기재 새모기 동남쪽에서 양남면 효동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쇠모기재’라고도 한다.
언고개 대수저수지 안쪽에 있는 작골, 즉 죽전 동북쪽에서 송전리 고천으로 넘어가는 고개.
구시복골폭포 높이 10m 정도 높이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자연폭포로 계곡의 구석에 있다고 ‘구시복골폭포’라고 부른다. 새모기 올라가는 어귀 서편 골짜기에 있다.
문둥병도 고쳤다고 ‘약물’
무등골 옛날에 이곳에서 나는 약물로 문둥병을 고쳤다고 하여 ‘무등골’이라고 한다. 이 물을 먹으면 옻이나 피부병에 특히 좋다고 한다. 새모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약물탕골 약수가 나는 골짜기로 암벽에서 물이 쏟아지는데 하도 차가워서 한참 물을 맞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몸이 아픈 사람이 물을 맞으면 나았다고 한다. 피부병과 신경통에 좋다고 하여 물 맞으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 물 맞으러 올 때는 비린내 나는 음식을 금하고 와야 한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고기를 먹고 이곳에 오다가 뱀이 길을 막았는데도 들어가다가 넘어져서 다쳤다고 한다. 한 여름에도 추워서 못 들어간다고 한다. 지금은 이 물을 마을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생이골 이곳에 나는 나무로 상여를 만들어서 팔았다고 하여 ‘새이골’, ‘시골’이라고도 한다. 새모기 서남쪽에 있다.
효재골 양북면과 양남면의 경계가 되는 고개로, 죽전리 남전 서남쪽에서 양남면 효동리로 넘어가는 고개, 효동 사람들은 ‘대숲고개’라고 한다.
북치골 마을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치골’이라고 한다.
절테골 절이 있던 곳이라 ‘절테골’이라고 한다. 빈대가 많아 불태웠다고 한다. 아직도 절터가 남아 있다.
대수저수지 본래 보가 있었던 자리에 못을 막아 이 마을에서는 ‘봇골못’이라고 한다. 1954년경 이 못을 막을 때 마을주민들이 지게에 흙을 져다가 부었다고 한다.
당나무 수령 70년 된 느티나무를 당목으로 모시고, 매년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냈지만 15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양남 5가구 편입해야
가장 작은 마을 죽전은 우산과 조항산, 형제봉산 등 동대산 지령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수려한 산골마을로 17가구, 양남을 포함하면 22가구가 한 가족처럼 인정 있게 살아가고 있다.
양남 5가구의 죽전 편입을 희망하고 있고, 목욕시설이 없어 주민들이 불편한데 마을회관을 새로 지어 주민들이 목욕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가 좁아 차들의 교행이 어렵다. 안전지대라도 설치해서 차량 교행이 가능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경주기관차 승무사무소와 2006년 5월 자매결연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