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을 마침비에 이끌려 성큼 성큼 큰 대자로 걸어와 편안히 좌정하는 계절이다. 시가지 골목어귀마다 따끈따끈 붕어빵이 하얀 입김마냥 하늘로 피어오르고, 어묵 한 입 베어 문 볼이 빨간 어린놈의 만족한 눈망울에서 겨울이 살포시 우리네 가슴언저리에 찾아왔다.
세모를 알리는 구세군 붉은 깃발과 자선냄비는 온종일 딸랑대기 시작하고, 속이 꽉 찬 알배기 배추들을 실은 화물차가 시가지를 활보하기 시작한다. 한 해를 마무리할라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추운 이웃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을 온통 도배질하는 것을 보면, 반짝 온정이라도 솜털 같은 눈송이처럼 따뜻하게 온누리를 뒤엎어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신라 최고의 미색으로는 24대 진흥왕대의 미실이다. 이후 미실은 진흥왕의 태자 동륜과의 사통을 비롯하여, 25대 진지왕(진흥왕의 둘째 아들 금륜)을 왕위에 올리기도, 또한 폐위하기도 하였고, 동륜태자의 아들 26대 진평왕까지도 자신의 치마폭에 감싸 안고 신라왕실을 쥐락펴락하였다.
그리고 남편인 세종전군을 수절하게 만들었고, 사다함과의 핑크빛 사랑으로 향가 <송출정가>와 <청조가>를 남기기도 하였고, 7세 풍월주 설원랑을 자신의 손바닥에서 놀게 만들었던 미실을 서라벌 최초 최고의 색녀라고 하는 데는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29대 무열왕에서 시작된 삼한병합전쟁은 그 아들 30대 문무왕대에 끝나게 된다. 거듭된 전쟁수행으로 심신이 지친 문무왕의 석연찮은 죽음은 뒤이어 왕위에 오른 31대 신문왕의 왕권을 위태롭게까지 했다.
신문왕 원년(681)에 일어난 27세 풍월주 김흠돌의 난이 그 정점에 다다랐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의 전쟁수행에는 화랑의 전공이 하늘을 찔렀지만, 통일을 달성한 후 한 곳으로 모아진 힘을 분산시키는 정책에는 실패한 신라왕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차라리 화랑 및 고구려 백제의 젊은 무사들을 독려하여, 중원 고토 수복에 힘을 쏟았다면 신라의 역사는 엄청나게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고 했던가? 두고두고 후회막급한 일이다. 현금 중국의 동북공정 야욕을 보면 더욱 통탄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에 신문왕은 화랑을 폐지하고, 새로운 청소년 수련기관인 국학을 창설하기에 이른 것이다.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부흥운동은 점차 힘을 잃어갔고, 33대 성덕왕대가 되면 신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통일신라문화를 꽃피우기 시작했다.
이때 강릉태수로 부임하는 순정공이 있었다. 그는 서라벌 미색의 대명사 미실을 능가하는 수로라는 부인을 두고 있었다.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여러번 신물(神物)에게 잡혀가기도 하였다고 ‘삼국유사’ 수로부인편에 전한다.
강릉 임지로 가는 부군을 따라 나선 수로일행은 가는 도중, 동해안 절경 해안가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앞은 푸른 바닷물이 끝없이 이어졌고, 한가한 갈매기는 서라벌 미색을 구경코자 이리저리 날고 있었다.
때는 만춘지절(晩春之節), 종달새는 하늘가를 맴돌며 봄을 만끽하고, 기암괴석과 어울린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의 하루 종일 향연에 꽃향기가 온 산하를 뒤덮고 있었다.
S라인으로 뭇 남성들을 울린 수로는 자신의 몸매 유지를 위해 한 두 끼 식사쯤은 예사로 거르곤 하였다. 일행들의 식탐을 뒤로하고 수로는 봄 향연에 동참하였다.
세상 만물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는 봄날은 인간 중에 백미로 자타가 공인하는 수로로써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천길 벼랑위에 홀로 핀 척촉화(진달래 혹은 산철쭉)가 수로를 향해 빼꼼히 얼굴을 들고는 수줍은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얼마나 고혹적인 자태였는지 그만 수로는 얼어붙어 버렸던 것이다.
이내 정신을 되찾은 수로는 옷매무새를 고치고, 종자들이 허겁지겁 식탐을 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종자들에게 척촉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체 없이 꺾어다 바치라고 명하였다. 순간 종자들은 너무나도 황당한 수로의 지시에 손사례를 치며 변명에 급급했다.
수로는 단단히 화가 나서 다시 한번 명해보지만, 겁먹은 종자들은 움직일 줄 몰랐다. 때마침 암소를 이끌고 가던 촌로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몸은 이미 늙어 하룻밤 운우의 정도 힘들지만, 그러나 마음은 아직 청춘 아닌가? 더구나 머얼리서 보아도 칠색 무지개가 피어오를 정도의 미모에다가 서라벌 최상층 귀부인인 수로의 청이라면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짓을 생각한다고 했던가? 또한 언제인지도 기억에 없는 운우의 정을 생각하니 벌써 하초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순간, 노인은 여러 가지 상념이 뇌리에 가득했다. 누군가 주책이라는 웅성거림도 더욱 결정을 힘들게 만들었다. 먼저 맹서를 해버리면 용기가 더욱 백배할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것도 머뭇거릴 것도 없지 않은가. 이에 노인은 수로부인에게 향가 ‘헌화가’를 불러 주면서 자신의 두려움을 억제하려고 했다. 현대어로 이 향가를 불러보면,
짓붉은 바위 가에 잡고 가는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겠습니다
노래를 마친 노인은 비호같이 천길 벼랑에 올라가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미인은 잠꾸러기가 아니라 욕심쟁이인 것 같다. 또한 어쩌면 자신의 미를 이용하여 모든 남성들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고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해달라고 보채는 수로의 행동을 보면, 앞뒤 가리지 않는 ‘백치미’가 아니었을까 한다. 뒤이어 동해의 해룡에게도 붙잡혀 갔던 수로는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돌아왔으나, 돌아 와서 한다는 말이 “칠보로 꾸민 궁전에 먹는 음식들이 달고도 연하고 향기롭고도 깨끗하여 인간세상의 음식이 아니더이다”라고 순정공에게 바다 속 일을 태연히 말했다.
이것은 이물에게 납치라는 수모를 당하고 돌아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수로는 자신의 미모를 흠모하여 납치를 한 해룡을 나쁘게 보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유람이라도 갔다 온 양 뽐내는 조금은 덜 떨어진 백치미의 화신이 아닐까?
지금 각 지방자치단체는 수로의 천길 벼랑 찾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 그리고 강릉 또한 이 일에 온갖 묘안을 짜내고 있다. 서로의 아전인수(我田引水)적인 해석에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천년신라의 노래 향가를 오늘에 되살리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대다수 향가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 있는 우리 경주는 어떠한가. 모르는지 알고도 모른 채하는지 아직은 묵묵부답이다. 아니면 그 어느 날이 오면 한꺼번에 중차대하게 진행하려고 참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속내를 알 날이 기다려진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pjw32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