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햇살이 자꾸만 냉기를 품고 있다. 멀리 보이는 설악산엔 단풍의 낯빛이 나날이 희미해져 가고, 차창을 열자 벌써 동장군의 입김이 제법 매섭다.   화랑들의 주유천하를 밟으며 뒤따라오는 동안 우리는 동해안 절경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기암괴석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화랑관련 전설 한 자락쯤 간직하고 있었고, 풍광이 수려한 해안가 송림 속에도 역시 화랑국선들의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먼 조상들이 태초 이래로 따뜻한 남쪽나라로 향했던 길을 거슬러 말을 달려 간 것은 아닐까. 수구초심이라고 했던가?    아마도 화랑들의 뇌리에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고향으로의 회귀의식이 그들을 이곳 동해안으로 말을 달리게 하였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속초에 도착하자 해가 뉘엿뉘엿 산봉우리를 가까스로 넘어가고 있는 초저녁 나절이었다. 뒤로는 설악산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고, 시내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청초호, 영랑호 등의 석호가 또 다른 흥취를 자아내기에 충분하고, 앞은 동해바다가   푸르게 속삭이는 이곳 속초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관광도시로써는 조금의 손색도 없어 보인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속초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가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만하다.   여기서 우리 경주는 어떠한가? 도처에 널린 천년신라의 보고(寶庫)만을 안고 있을 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냥 과거에 매달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늙은 노인의 슬픈 눈망울을 연상한다면 지나친 억지일까? 역사문화도시 조성도 어느 지방자치단체의 어설픈 딴죽걸기에 주춤하는 나랏님을 보면, 조성 의지를 기대하기란 ‘없는 손자 환갑지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다.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외면하였던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저장고 역시 돈 몇 푼에 할 일 다 한 것처럼 뒷짐만 지고 있는 작금의 태도는 언젠가 역사가 그들을 준열히 평가할 것이란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영랑호를 찾아 가다 먼저 속내를 보여 주고 있는 청초호에 들렀다. 속초시 중앙동, 금호동, 교동, 청학동, 조양동, 청호동으로 둘러 쌓인 청초호는 말 그대로 청초하고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곳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청초호는 어귀 쪽이 바다에 연해 있어 조선시대에는 수군만호영을 두고 병선을 정박시켰다고 한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양양의 낙산사 대신 이 곳을 관동팔경의 하나로 들고 있다. 영랑호와 더불어 쌍성호라 불리기도 하였다는 데서 나타나듯이 속초는 영랑호, 청초호의 빼어난 맵시로 인해 세상에 알려졌던 곳이란 짐작이 간다.   청초호 주변에 실향민의 슬픔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매일 망향의 한을 달래는 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속초시 청호동이지만 ‘아바이 마을’로 더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6·25 동족상잔의 아픔을 가슴 한 곳에 평생 안고 살아가는 아바이 마을 사람들의 고향은 함경도라고 한다. 지금 2·3세들에게 고향 알리기에 분주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몇 안 되는 1세대 피란민들은 오늘도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겨울연가’ 촬영지가 있다. 드라마 한편 촬영으로 일약 전국 및 세계의 관광객들이 줄이어 찾아오고 있다고, 앞니 하나 밖에 남아 있지 아니한 할머니가 활짝 웃음으로 동네 자랑에 여념이 없다. 길 안쪽 ‘은서네 슈퍼’는 깨끗한 천연색 간판으로 새 단장을 하고 손님을 향해 손짓을 한다. 정겨운 풍경이다.   청호동을 나와 대포항을 지나면 ‘외옹치항’이 전형적인 우리네 어촌마을로 포근히 길손을 맞이한다. 설악산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가 마지막 동해를 향해 큰 절을 하는듯한 이곳 외옹치항은 그 이름처럼 옹골차게 차분히 자리하고 있다.   조그만 고깃배에 걸려 있는 만선 깃발이 빛바랜 채로 뱃전 대나무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것을 보면 요즘의 조황을 읽을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고기가 잡히지 않으니 골목길 어귀의 가로등마저 희멀겋게 졸고 있다.   벌써 어둠이 발목을 휘감는다. 바람도 세차게 귓불을 때리고, 속은 비어서 허기를 채울 요량으로 깜박이는 조그만 불빛을 따라 바닷가 포장마차에 갔다. 조개 가리비의 본향으로 알려져 있었던 외옹치항구는 예년과 다른 조과에 이젠 맛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생선 몇 마리와 싸한 소주 한잔에 시장기를 채우고 영랑호를 찾아 밤길을 재촉하였다.   영랑호는 벌써 네온사인이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이곳 영랑호는 속초시 장사동, 영랑동, 동명동, 금호동에 둘러 쌓여 도심 속 한적한 전설을 오목조목 이야기 한다.   그 옛날 화랑 사선(四仙)으로 유명한 영랑, 술랑, 남랑, 안상등이 풍악(금강산)에서 심신수련을 마치고, 명승지 삼일포에서 사흘간 머물다가 서라벌로 돌아가는 길에 이곳 호수를 만나게 되었다. 잔잔한 호수면에 비치는 풍광은 마음을 빼앗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설악산 울산바위와 범바위가 호수에 잠들어 있었고, 마침 지는 해의 노을은 일렁이는 물결 따라 아름다움의 극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에 온 마음을 호수에 매료된 영랑은 일행의 재촉에도 아랑곳 하지 않다가 결국 그들만 서라벌로 떠나보내고, 자신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 호수를 영랑호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후일 화랑들의 주요한 유오산수처의 하나로 수많은 화랑들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여기서 풀무질한 건강한 신체와 올곧은 정신은 삼한을 통합하기에 이른 것이다. 작은 불빛 여럿이 깔깔대는 소리와 함께 영랑호반을 달리고 있다. 자전거를 탄 영랑의 후예들이었다. 호수 주변으로 말끔히 단장된 자전거 도로는 가로등 불빛을 따라 4킬로미터나 연이어 있었다. 맑은 공기와 불야성을 이루는 호수의 화려함은 넋을 잃기에 족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역사상 이름을 남긴 시인묵객들 중 이곳 영랑호를 예찬한 이는 한 둘이 아니다. 고려시대 안축이 한시로써 영랑호를 읊었고, 또한 자신이 지은 경기체가 ‘관동별곡’ 제5장에도 영랑호를 그리고 있다.   같은 시대 이곡의 ‘동유기(東遊記)’에도 보이며, 더불어 한시도 한수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구사맹, 이상질, 이세구, 김창흡, 이몽규 등 많은 문인들이 이곳을 노래하였고, 조선시대 가사의 백미인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영랑호가 소개 되어 있다.   찬바람 한줄기가 호수면을 가로질러 나그네를 채근한다. 차가운 바람인데도 낯설지가 않다. 입고 있던 외투를 벗고 두 팔을 벌려본다. 아마 그날 영랑도 기자와 다름없이 한없이 벌린 가슴으로 삼한을 품고, 중원 도모를 향한 기개를 드날렸으리라.   혹자는 신라의 삼한통합으로 국토의 3분의 2를 잃어 버렸다고 한다. 물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 소국으로 태동하여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한 한민족의 정체성을 하나로 모으게 한 업적마저도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화랑국선의 발자취를 따라 동해안을 주유하였다. 골골에 묻어 있는 화랑들의 혼을 느끼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비록 철조망을 넘어 금강산으로 가보지는 못했어도 그들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이곳 동해안 절경이 안성맞춤이었다는 판단이 선다. 차제에 금강산으로 화랑 흔적 찾기는 계속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 멀지 아니하다는 것은 모두가 동감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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