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골짜기를 낀 마을이라 ‘개곡(開谷)’임란의사와 3년시묘의 충효마을
토함산 준령에 잇대어 남쪽으로 길게 뻗은 동대산이 울긋불긋 몸단장에 한창이다. 경주에서 7번 국도로 불국사와 괘릉을 지나면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들판 왼쪽으로 동대산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낸다. 개곡은 동대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동대산 굵은 등성이들이 빚어낸 깊은 골짜기를 끼고 있다. 따라서 항상 맑은 물이 흐르는 데다 넓은 들판까지 안고 있는 천혜의 마을이다. 남쪽으로는 입실에 맞닿아 있고, 북쪽에는 말방, 서쪽에는 연안과 이웃하고 있다. 동쪽은 동대산을 사이에 두고 양남면 효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깊은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이라 ‘개곡(開谷)’이라고 했다는 이 마을은 예로부터 비옥한 토질과 풍부한 물로 질 좋은 쌀을 생산해 왔다. 2003년부터는 ‘부농쌀작목반’을 결성하여 우렁이농법으로 친환경 쌀 생산에 노력해 왔으며 올해 30가구가 50ha에서 ‘친환경 쌀’을 재배해 추수에 한창이다.
우렁이농법의 ‘친환경 부농 쌀’
개곡을 찾았을 때 동대산 자락의 쉿골과 성지골의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풍부한 물을 농업용수로 활용하기 위해 100만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개곡저수지의 막바지 공사가 한창이었다. 2007년도에 저수지가 완공되면 이 일대 들판에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할 것이다. 또 7번 국도에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 마을에는 최근 공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현재까지 44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연안의 동쪽에 있는 ‘개곡’이 개곡1리, 개곡 서북쪽의 ‘대성’이 개곡2리를 이루고 있다. 경주시청 기점으로 20km 25분 거리이다.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한우 7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1리는 아파트를 포함해 307가구에서 822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이중 남자는 406명, 여자는 416명이다. 2리는 98가구에 남자 127명, 여자 124명으로 251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민 1천여 명의 큰 마을
개곡(開谷 개곡1리) 영천 신녕에 살던 해주인 견중근(堅重根 신녕현감)이 1492년경 머루와 다래넝쿨을 치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뒤에 천북 모아에서 대호군(大護軍) 오두원(吳斗元)이 이거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처음에 ‘개국(開局)’이라 불렀으나, 150여 년 전 해주견씨, 고창오씨, 김해김씨, 청안이씨, 학성이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마을이 깊은 골짜기를 끼고 이루어졌다고 ‘개곡(開谷)’이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다른 이야기는 마을 동편에 쇠가마가 있어 ‘부동(釜洞)’ ‘개부동(個釜洞)’이라 불렀고, 조선 초기에는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으로 ‘빈자촌(賓者村)’이라 불리다가 일제시대에 ‘개곡(開谷)’으로 고쳐 불렀다고도 한다. ‘낙의재실기’, ‘송호실기’등에는 ‘개곡(開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제 해마다 음력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당목은 마을 가운데 있는 당집 옆에 선 50년생 느티나무다. 본래 이곳에는 오래된 회나무가 있었으나 6.25전쟁 때 미군들이 사격연습을 하여 나무가 죽었다고 한다.
대성(大城 개곡2리) 임진왜란 때 적을 막기 위해 큰 성을 쌓기로 계획한 곳이었다고 ‘대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 옛날 어떤 사람이 이 마을에서 크게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대성’이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외동휴게소가 있는 국도변 일대에 자리하고 있다.
미군 사격연습으로 당나무 죽어
가야재(伽倻齋) 옛날 이곳에는 고창오씨(高敞吳氏) 종중에서 세운 강신재(講新齋)라는 성당이 있었으나 오래되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고창오씨(高敞吳氏) 후손들이 1961년도에 새로 세운 재실이다. 4칸 맞배지붕으로 최근에 덧창을 설치하고 축담을 시멘트로 새로 단장해 놓았다. 개곡1리 56번지에 있다.
오체정 경주인 이규태(李圭泰)의 5형제가 우애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정자로 1958년에 3칸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개곡에 세웠다.
회헌정(悔軒亭) 개곡에 사는 김해김씨(金海金氏) 후손들이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1965년에 지은 정자다. 4칸 접집에 팔작지붕을 얻었고 솟을삼문을 세웠는데 지금은 그중 동쪽 문과 담장이 허물어져 있다.
죽계사(竹溪舍) 임란의사이며 조선 선종 때 현감을 지낸 김영인 김흡(金洽 1550~)을 추모하여 2004년 6월 김영김씨 죽계공파 후손들이 개곡에 지은 제사다.
백운암(白雲庵) 가라골에 있던 암자로,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군량미와 병기를 비축하고 누름진평전에서 결진할 때까지 군사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왜적들의 습격으로 소실되었다.
임란 때 무예 익힌 ‘누름진평전’
누름진평전 가뫼골의 중심 평원으로, 임진왜란 때 견천지(堅川至), 오경우(吳敬友), 이눌(李訥), 김응하(金應河), 오심, 오열(吳悅) 등 의사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함께 무예를 익힌 곳이라 하며, 견천지 의사는 의병 500명을 이끌고 기박산성으로 가서 울산 의병들과 합진하였다고 한다.
가라골 쉿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다래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추곡(楸谷)’이라고도 한다. ‘신산등’, ‘시이골(때때골)’, 은행수등, 안산등, 삼시곡, 소암자곡, 독자곡 등의 골짜기가 있다. 견씨(堅氏)의 문중산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임란 때 병사들의 훈련기지라고 한다.
암자골 백운암 절이 있었던 골짜기로 임란 때 군량미와 병기 등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임란 때 병사훈련기지였다.
불선골 불을 밝히고 치성을 드리면 소원 성취된다고 하는 영검한 골짜기로, 가라골 남쪽에 있다.
성짓골 개곡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쉿골 개곡에서 가장 큰 골짜기로 가매골 북동쪽에 있다. 이 골짜기를 중심으로 개곡저수지가 들어섰다.
중산 쉿골 안쪽 등성이로 스님들의 다비식을 했던 자리로 이곳에는 불에 검게 탄 흙이 있다고 한다.
가뫼골 개곡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가마골’, ‘부곡(釜谷)’이라고도 한다. 이 골짜기에 ‘약물내기골’, ‘놀기미골’, ‘대성골’, ‘절테골’, ‘마시미기’, ‘누름진평원’ 등이 있다.
평풍골 소붓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가 병풍을 두른 형국이다.
한삼밭골 평풍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영지 바른 곳에 집터가 있었다고 ‘집테양달’이라고도 한다.
가뫼골재 개곡에서 양남 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가뫼골 위에 있다.
개야골 마을 동쪽 가야산에 있는 골짜기로, 재실인 가야재(伽倻齋)가 있다.
재탯골 절이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절탯골’이라고도 부르며, 불선골 북쪽에 있다.
고지골산 지금은 공장지대가 들어선 산으로 속명은 ‘지선’이라고 한다. 선사시대부터 주거한 흔적이 있으며, 돌도끼,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었다.
낙뫼골 솔선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현재 마을 동산이다.
방아선골 낙뫼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놀기미기 큰모밭 남쪽에 있는 고개로, 노루가 많이 서식하였다고 한다.
들판에서 장구소리가....
두북골 마을의 뒤쪽에서 순못밑에 걸쳐 있는 들.
뒤깔밭 개곡의 뒤쪽에 있는 갈밭으로 본래 띠풀이 무성한 황무지 야산을 일부는 개간하였다. 7개 문중이 참여한 계중산이었으나 지금은 분할했다.
마시미기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군마(軍馬)를 먹였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멎절들 개곡 북쪽에 있는 들로, 원사평(遠寺坪)이라고도 한다. 절이 있던 곳으로 탑 개석이 마을 앞까지 떠내려 온 것을 한 때
마을 표시(4H) 돌로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밸못 배 모양으로 생긴 못으로 ‘배못’이라고 불리다가 ‘밸못’이 되었다. 대성들 일부와 장구시미들에 농업용수를 공급했으나 덕동댐 물이 공급되면서 못이 없어졌다. 현재는 경지정리로 논이 되었다.
개못 개곡 북쪽에 있는 못으로 2001년 농지정리 때 없어졌다. 지금은 덕동댐 물을 쓴다.
보름이 개곡 동남쪽 언덕 위에 있는 들로 지금은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
숯못 개못 북쪽 뒤깔밭 앞에 있는 못으로 1991년 글래디스 때 터졌다.
장구시미 장구소리가 났다는 들판. 조선시대 이 마을 김순(金筍)이라는 장사가 죽어 장구시미 뒷산에 묻었는데, 이때 들판에서 장구소리가 나서 가보니 용천수(湧泉水)가 솟았다고 한다. 이 물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며 사시사철을 그침이 없었다고 한다. 김순은 말방에 동창(東倉:면사무소)을 지을 때 얼마나 힘이 세었던지 혼자서 하룻만에 그 많은 건축 자재를 다 옮겼다고 한다.
용천(湧泉) 중마을 대보둑 밑에 있는 샘으로, 깨끗한 찬물이 늘 솟아난다. 옛날에는 이물을 식수 사용했으나 지금은 빨래터로 사용하고 있다.
약물내기 약물이 났다고 하는 골짜기로, 큰모밭골 남쪽에 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늘 같은 량의 물이 나오고 있다.
택구바댓들 개곡 서쪽에 있는 들로, 마치 토끼처럼 생겼다고 하여 ‘토끼평’이라고도 한다. 마을 뒷들이다.
황새밭 마을 밑에 있는 들로, 황새가 많이 날아온다. 용천 아랫들이다.
개곡쉼터 이 마을은 마을회관 일대에 800여 평의 넓은 마을공원을 1987년에 조성하여 마을 주민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곡리 부농 쌀 작목반 부농의 꿈을 이루기 위해 2003년 결성한 ‘개곡리부농쌀작목반’은 현재 30가구가 참여하고 있으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외동농협과 계약하여 개곡 뒷들을 우렁이를 이용한 친한경쌀단지로 지정하고, 올해 50ha에서 친환경 쌀을 재배했다. 비옥한 황토질과 맑은 물을 이용해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을 최소화하여 질 좋은 쌀을 생산하며 부농의 꿈을 키우고 있다.
주민숙원사업 없는 마을
개곡은 보기 드문 충효의 마을이다.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견천지, 오경우, 이눌, 김응하, 오심, 오열, 김흡 등 많은 임란의사들이 분연히 일어났던 충의의 마을이요, 지극한 효심과 3년간 시묘살이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효자 오무용으로 유명한 효자의 마을이다. 효자 오무용은 강원도 영월에 살다가 어머니가 고향 가자는 말 한마디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살았다.
봄·가을로 어머니를 업고 들 구경을 시키는 효자였으며, 1959년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을 꼬박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아 머리가 나무뿌리처럼 뻣뻣했다고 한다. 효성에 감복한 범이 그를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지금도 그가 시묘살이 했던 곳에 집터가 남아 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표창하고 이곳을 방문해 격려금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주민들에 따르면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집안이 일어나고 아들 취직도 하고 어렵던 집안이 폈다고 한다. 또 이 마을은 주민숙원사업이 없는 마을이다. 다른 마을에서 한 만큼은 다 했기 때문에 특별히 주민들의 불만사항이 없다는 것이다. ‘만족을 부족하게 여기면 늘 부족하고, 부족을 만족할 줄 알면 늘 만족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인물 많기로 단연 돋보여
예부터 충신과 효자가 많았던 이 마을은 요즘도 많은 인물을 배출하고 있다.오도필(83·전 천북초등 교장), 오병학(80 부산 계림화학), 오민필(72·전 울산정보고 교장), 오보필(72·전 감포읍장), 견학필(72·전 경성대 대학원장), 오상필(71·부산 동광목재), 최병훈(71·전 신라고 교장), 이수일(71·전 구로구의원), 오용문(66·전 계림초등 교장), 오진필(63·전 대구시의원), 김치행(63·경북도의회 사무처장), 오용찬(60·경주시농업기술센타 소장), 김문조(55·예비역 육군준장), 견종필(40·인천지법 판사), 오선희(35·서울고법 판사), 최호식(38·포항지원 판사), 이상조(50·경북보건환경연구원)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
항상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로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견정필 이장님의 안내와 후의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