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고등학교  교사 쌍림사(雙林寺)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 산서성 평요교성 서남 6km에 위치한다. 창건연대는 불확실하지만 쌍림사에는 북송 (大中祥符) 4년(1011) 세워진 (大宋姑姑之碑)에 (北齊 武平) 쌍2년(571)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창건은 그보다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쌍림사의 여러 전각 안에는 총 2,052점의 다양한 채소상(彩塑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들 중 금강역사, 천왕상 같은 규모가 큰 것은 높이가 3m에 달하고, 작은 상은 40~50cm 정도이며, 환조, 부조 등 다양한 상들이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있는 모습을 자랑하고 있어 ‘彩塑藝術의 博物館’ 혹은 ‘彩塑藝術의 明珠‘라 일컬을 정도이다.   석가전 내부 동·서·북벽에 소조상으로 조성되어 있는 불전은 특히 주목된다. 사면의 벽에 4단으로 구성하고 각 층마다 몇 개의 구획을 지워서 인물상의 크기를 약 40cm크기로 하여 불전의 내용을 소조상으로 만들어 석가모니의 일생을 시기적으로 구분, 입체적으로 조성하여 석존의 일생을 알아보기 쉽게 배열하여 놓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에 중요한 장면마다 나무가 함께 등장한다. 이때 나무의 의미는 (聖子)를 뒤에서 보호하는 숲의 신(神)이며, 배경으로서 마치 병풍과 같은 역할이다. 주요한 장면에서 보이는 몇 나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출생시의 무우수(無憂愁), 태자시절 (思惟) 할 당시의 염부수(閻浮樹), 고행을 하던 보살을 도와준 아사나(阿斯那), 깨달음을 얻을 때의 보리수(菩提樹), 성도(成道) 후 (禪定)을 하고 계시던 이구타수(尼拘陀樹), 열반의 배경이 되는 사라쌍수(娑羅雙樹)이다.   부처님의 열반은 당시 불교도들에게는 더 없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고, 교주께서 열반하시는 그 순간의 모습을 자세하면서도 장엄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생각으로 쌍림입멸 혹은 쌍림열반의 장면을 몇 가지 경전에 남겨놓았는데, 그 중에서 ‘석씨원류응화사적’ 2권 ‘쌍림입멸’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라수의 숲은 네 쌍 여덟 그루의 나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서쪽 한 쌍의 나무는 부처님 앞에 있었고, 동쪽의 한 쌍의 나무는 부처님 뒤에 있었으며 , 북쪽의 한 쌍의 나무는 부처님의 머리맡에 있었고, 남쪽의 한 쌍의 나무는 부처님의 발아래 있었다. 한밤중에 이르러 제4선에 드시더니 적연히 소리가 없었다. 이 무렵에 문득 열반의 세계로 옮겨가셨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동서의 두 쌍의 나무는 합쳐져서 하나의 나무가 되었고,     남북의 두 쌍의 나무도 합쳐서 하나의 나무가 되어 가지가 드리워져 보배 침상을 덮고 부처님의 시신을 덮었다. 그 나무는 즉시 참연하게 흰 빛깔로 변해서 마치 백학과 같아졌고 가지, 잎, 껍질, 밑둥이 모두 모조리 터져서 땅에 떨어져 점점 말라 죽어갔다”   여기서 (白鶴)이라함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에워싸고 있었던 사라나무들 모두가 슬픔에 말라죽어 마치 하얀 학처럼 변하였다고 학림이라 하였는데 그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아마 중국의 쌍림사라는 절 이름도 역시 열반을 기리기 위한 이름이라면 우리나라에도 그런 절 이름이 있음직도 하건만 필자가 과문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들은 적은 없다. 다만 몇몇 사찰의 주련에 (鶴樹), (雙林)이라는 어구는 발견이 되는데 그 내용은 이런 것이 있는데 이 모두가 열반의 불교 신도들에 주는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아닐까한다. (示寂雙林問幾秋) 묻노니 쌍림에서 열반에 드신지 무릇 몇 해인가(통도사 적멸보궁 주련)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에서 마지막 설법도 현묘한 이치는 못 되네.(통도사 금강계단 주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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