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그냥 겨울을 향한 하루 이틀의 여유밖에 남기지 못하고 이내 사라지는 운명인가 보다. 붉고 노란 향연을 시작도 하기 전에 수은주가 영하를 가리키니, 자연을 역행해 온 인간들의 좁은 소견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는 가를 폐부 깊숙이 느끼게 해 준다.   월송정을 나와서 실직국 옛터인 삼척에 다다랐다. 동해안 일주도로 곳곳엔 갈매기들의 하늘 가림이 해를 가리고, 푸른 바닷물만이 화랑국선들의 넋을 위해 오늘도 쉼 없이 넘실거리며 그날의 전설을 들려주고 있다.   삼척시 원덕읍 신남마을에 도착하니 관광버스 행렬이 작은 항구 주차장을 메우고 있다. 주차장 옆으로 이어진 생선구이 행상에는 크고 작은 구운 생선들이 관광객을 모으고, 삼삼오오 짝지은 화려한 꽃무늬 아지매들이 까르륵 까르륵 전원주 웃음으로 이리저리 활개를 치고 있다. 이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딸기코 아저씨가 하나 둘씩 팔자 구자 걸음에 익숙해져 있다.   신남항 뒤편 구릉에는 동해안 유일의 남근석 공원인 해신당 공원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天下大男根’이라는 거대한 목남근(木男根)이 하늘을 향해 성낸 모습으로 시위를 하고, 부끄러움에서 졸업한 듯한 아지매들도 이곳에서는 투박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억지 춘향격으로 조심스럽게 손바닥 사이로 빼꼼히 남근을 바라보며 킬킬대고 있다. 약 400년 전의 일이었다.   ‘신남마을에는 결혼을 약속한 처녀와 총각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의 정혼자인 총각과 함께 배를 타고 해초를 채취하기 위해 해변에서 조금 떨어진 자그마한 바위에 내렸다.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총각을 뒤로하고 처녀는 해초 캐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광풍이 불고 파도가 거세게 일어나서 그만 처녀는 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신남포구에는 고기가 잡히지 않아, 마을 주민들은 시름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젊은 건장한 어부가 바다를 향해 자신의 양물을 높이 쳐들고 소피를 보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동안 온갖 치성을 올려도 잡히지 않던 고기가 예전처럼 잡히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정혼자와 결혼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처녀의 원혼 때문이란 것을 알고는, 매년 정월 대보름이 되면 실물 모양의 남근을 여러 개 만들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해신당에는 처녀의 화상이 모셔져 있고, 그 앞 제단에는 남근이 놓여져 있다. 구천을 헤매던 처녀의 원혼이 이제야 한을 풀고 편안히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곳 해신당으로 오르는 길 옆 안전 구조물에도 남근이 줄지어 하늘을 향해 곧추 서 있다. 지나가는 처녀 길손들이 남근(?) 하나하나를 잡으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웃음을 넘어서 해학으로 승화된 옛 실직국 백성들의 지혜를 발견하는 것 같아 덩달아 신이 난다.   아마도 서라벌 화랑국선들이 주유천하의 일환으로 이곳 해신당 자리에 올라서 하얗게 달려와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그들의 기상을 더 한층 높였을 것이다.   다시 해안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풍악으로 향한다. 기암괴석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더욱 절경을 이루고 있다. 왜 화랑들이 이곳을 그토록 애타게 달려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차창을 열고 바닷바람을 들이마셔 본다. 상큼한 내음이 갈매기의 활기찬 기운과 함께 속내를 시원하게 비워준다. 어디선가 향가 한 자락이 들려온다. 반갑다.   강릉이 눈에 닿는다. 38대 원성왕이 된 괘릉의 주인공 김경신에게 왕위를 놓친 김주원이 강릉군왕에 봉해져 한 많은 생을 살았을 이곳 강릉은 신라이후 계속 방외인을 배출한 곳이다.   세종조의 신동이며, 경주 남산 용장사지에서 한문소설의 효시 ‘금오신화’를 지었고, 우리들에겐 생육신의 한명으로 기억되는 매월당 김시습이 김주원의 후손으로 강릉 김씨이고, 사회소설의 선두인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유재론(有才論: 신분귀천을 떠나서 재주가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야 한다는 허균의 논설)으로 서자(庶子)들의 한을 대변하다 결국 칠서(七庶)의 난으로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한 교산 허균 역시 강릉 외가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니, 이곳 강릉은 유사 이래로 강직한 선비를 배출한 고장으로 자리매김 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옛날 서라벌 화랑국선들의 자유로운 기개가 이 땅에서 아직도 숨쉬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 한다.   강릉시 저동 94번지에 있는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숙정에 의해 현 방해정 뒷산 인월사 터에 처음 지어졌다고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3년(1508) 강릉부사 한급이 현 위치로 옮긴 후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경포대는 주유천하의 화랑국선부터 시작하여 고려 조선조를 거치며, 그동안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유람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여기 경포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경포8경’이라고 명명하여, 화랑국선의 전통의 맥을 이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포8경’은 녹두일출(綠荳日出), 죽도명월(竹島明月), 강문어화(江問漁火), 초당취연(草堂炊煙), 홍장야우(紅粧夜雨), 증봉낙조(甑峰落照), 환선취적(喚仙吹笛), 한송모종(寒松暮鍾)이다. 그 중 환선취적과 한송모종은 화랑국선들과 연관된 명명으로 보인다.   환선취적에서 선(仙)은 화랑들의 별칭이고, 월명사 도솔가조에 나오듯 화랑들은 향가와 젓대에 능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아마도 경포대는 화랑국선들의 중요한 유오산수처가 되어 이렇게 명명되었지 않았을까 한다.   또한 한송모종의 한송정은 녹두정이라고도 불렀던 곳으로 옛 신라 화랑국선들이 명산대천으로 유오산수하면서 이곳에서 심신을 쉬고자 할 때, 차를 달여서 마음을 정화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 이곳에는 당시 찻물로 이용된 돌우물(돌샘)과 차를 달이던 돌절구(石臼)를 뜻하는 연단석구(鍊丹石臼)라고 새겨진 돌이, 천 수 백년의 풍상을 안고 화랑국선들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경포대는 이름 그대로 우리들에게 먼 전설을 명경처럼 보여주고 있다. 조금씩 일렁이는 호수의 잔잔한 물결에 달 밝은 밤이 찾아오면, 조선의 으뜸 가객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처럼 다섯 달이 친근하게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는다.   첫째가 하늘에 떠있는 달이며, 둘째가 출렁이는 호수 물결에 춤추는 달이며, 셋째는 파도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달이고, 넷째는 정자 위에서 벗과 나누어 마시는 술잔 속의 달이며, 마지막 다섯째 달은 벗(님)의 눈동자에 깃든 달이라고 한다.   경포대의 밤은 쉬이 나그네를 놓아 줄 것 같지 않다. 서둘러 차를 몰고 속초로 간다. 이번 화랑 흔적 찾기 기행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것 같다.   그 옛날 화랑국선들이 삼국을 통일할 기상을 품은 곳을 하나씩 걸어보는 기쁨은 어찌 보면 기자에게는 대단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해버린 산하의 신음소리를 듣는 것 같아 못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특히 양양 낙산사는 끝내 외면해 버렸다. 의상대는 다행히 산불을 피했다고는 하나, 앙상한 몰골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지나쳐 버렸다.   후일 다시 무성할 낙산사의 적송을 기대하면서, 더불어 조금씩 희망도 함께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성낸 얼굴의 화랑국선 한 무리가 지나간다. 미안할 따름이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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