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찔끔 비에 벌써 저만치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턱없이 시각이 부족하다. 면앙정 송순은 시절가조(時節歌調)로 황국화를 읊었고, 미당 서정주는 내 누님 같다고 표현한 가을의 진객(珍客) 국화의 탐스러운 봉오리를 보고 있노라면, 풍성한 마음이 한가득 가슴에 차올라 석 달 열흘을 굶어도 부자로 살 것 같다.
포항으로 말머리를 잡아 경포산업도로를 따라가다 안강을 지나자, 흥해로 가는 도로가 왕복 4차선으로 맞이한다. 예전 같으면 포항을 거쳐서 동해안으로 진입하였는데, 지름길이 이렇게 깨끗하게 나있어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시원한 동해바다에 다가설 수 있다.
추수 끝난 들판엔 흰색 원통형 무더기가 이곳저곳에 나뒹굴고 있다. 무척 이색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농촌엔 낟알을 훑어 버린 볏단을 흰 비닐 같은 것으로 포장하여 판매를 한다고 한다. 역시 한국 사람의 아이디어는 세상 어디에다 내어놓아도 깜짝 놀랄 일이다.
오른쪽은 푸른 망망대해가 시원스럽게 뒤따라오고, 왼쪽은 기암괴석이 연이어 있는 이곳 동해안 해안선은 그 옛날 서라벌 화랑들이 유오산수(遊娛山水)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멀리 금강산으로 향하던 수많은 서라벌 국선들은 이곳을 가로질러 절경 곳곳에 그들의 흔적을 남겨 놓고 있다. 지금 달리는 차장밖에도 백마의 날렵한 발굽소리가 하모니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바닷가에는 높은 하늘에 반사되어 물빛을 투영하고 있는 넓은 백사장이 한 무리 흰 거품파도를 삼키고 있다. 해안도로 옆, 길 어깨에는 예외 없이 오징어가 부끄러운 나신(裸身)을 활짝 열고, 속살 태우기에 여념이 없다. 코로는 벌써 오징어 피대기 굽는 내음이 한웅큼 들어와 뱃속을 꼬로록 하게 한다.
매년 10월 1일이면 잡던 영덕 대게를 올해부턴 11월 1일부터 잡기 시작한다고, 빨간 립스틱 꽃무늬 쫄바지 아지매가 침을 튀긴다. 입맛을 다시면서 먼저 월송정(越松亭:月松亭이라고도 한다)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예서 조금 가니 거대한 프로팰러가 온 산머리를 휘감아 돌고 있다.
가던 차를 멈추고 쳐다보니 한 두 개가 아니다. 수 십 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이것의 정체는 화석에너지 고갈을 막는다는 취지로 개발된 풍력발전소라고 한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캘리포니아 풍경이 동해안 절경 영덕에서 만나니, 서라벌 화랑국선들이 마음껏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노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 화랑들이 말을 달리며 하늘을 향해 포효(咆哮)하던 이 산하에 다시 육중한 풍력발전소가 생기다니, 묵묵히 받아들이는 동해절경 산하의 고마움이 애달프기 그지없다.
멀리 명사십리가 나타나고 그 뒤로 끝없이 펼쳐진 적송들의 너울춤에 갈매기도 신이나 있다. 월송정이다. 입구 조그만 주차장과 기념품 가게가 있고, 바로 붙어 적송이 온 하늘을 막아서고 있다.
월송정(越松亭)은 옛날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라고 한다.
또한 서라벌 화랑국선들이 그들의 호연지기를 펼칠 요량으로 주유천하를 할 당시, 달밤에 송림 속에서 유희를 즐기던 곳이라고 하여 月松亭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이곳의 자연풍광을 보면, 화랑국선들이 주유천하 중에 여기 넓은 백사장에서 활쏘기 등의 무예를 펼치면서, 둥근달이 뜨는 밤이면, 그들의 전통인 향가를 지어 불렀던 화랑들의 명승이라고 하는 것이 훨씬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신라 화랑 사선(四仙)으로 유명한 영랑(永郞)·술랑(述郞)·남석랑(南石郞)·안상랑(安祥郞)이 고성 삼일포와 더불어 월송정에서도 놀았다고 한다.
후일 고려가 들어서고 나서 아름다운 관동팔경의 하나인 이곳에 월송정이라는 정자를 세우니 때는 충숙왕 13년(1326)이었다고 한다.
월송정 가는 길은 적송 잎이 길가에 주단을 깔아 놓은 듯 온통 빛바랜 황토색 일색이다. 입구에는 평해황씨 시조를 모신 제각이 있고, 오솔길을 따라 적송 참살이를 하다보면 약간 언덕배기에 날렵한 정자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화강암 대리석으로 된 계단을 오르면 팔작지붕을 한 월송정이 황금빛 모래사장을 앞에 두고서 동해를 호령하듯 용기 충천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아마도 그날 서라벌 화랑국선들의 용모도 이와 다름없이 힘차고 용기백배하였다고 여겨진다.
신라 화랑 사선 영랑은 울주군 천전리 서석곡(書石谷)에도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永郞戌年成業’이라고 뚜렷하게 예각되어 있는 서석곡엔 수많은 화랑들이 자신이 목표로 한 대업을 달성하고는 다시 주유천하를 위해 동해안으로 말을 달렸을 것이다.
월송정 적송에서 품어져 나오는 신선한 향기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어둡사리가 치자 이내 마음이 바빠진다. 서둘러 숙소를 찾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월송정을 벗어난다. 오늘밤은 이곳 평해에서 화랑들의 넋과 장진주사(將進酒詞)라도 부르면서 유숙하기로 하였다. 혹 그들의 흥취를 돋우면 잊혀졌던 향가 한자락이라도 듣는 행운이 나를 찾을 지도 모를 일이다.
월송정은 일찍이 서라벌 화랑국선들이 그들의 웅혼한 기상을 심어 놓은 곳이기도 하고, 고려말 순흥인 안축이 경기체가 ‘관동별곡’을 지으면서 세상을 품었고, 조선조 가인(歌人) 송강 정철 또한 가사 ‘관동별곡’을 읊으면서 세상과 통교한 곳이다.
넓은 백사장은 가없는 포용심을 가르쳐 주고, 울창한 송림은 더불어 사는 참살이 삶의 참모습을 말없이 오늘도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조그만 교실에서 주입식 교육에 찌든 어린 미래의 서라벌 화랑국선들에게 한번쯤 이곳을 둘러보게 하는 것을 권하고 싶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pjw322@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