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차장가로 스치는 감나무엔 이미 대롱대롱 높아만 가는 바알간 감들이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골짜기 구불구불 이어진 논은 벌써 추수가 끝나고, 동네어귀 배추·무밭에는 싱싱한 김장거리가 입맛을 다시게 한다.   계속 푸르게 겨울을 맞이할 것 같던 단풍잎이 가을 햇살에 아름다운 운무가 되어 기자를 유혹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천 나들목으로 나와 청도 방향으로 내달린다. 시원한 산곡(山谷)의 풍경이 금수강산이라 할 만큼 수려하다. 이윽고 어디선가 화랑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그날 유신랑도 중악석굴에서 얻은 보검을 품고, 이곳을 가로질러 무예를 시험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우징곡(雨徵谷 : 우중골) 동네 입구에 간이 주차장을 마련해 놓은 것을 보니,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을 위한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심성이 한가득 밀려온다.   마을은 상수도 공사로 입구부터 포크래인이 가로막아 더 이상의 차량진입은 불가하다고 알려준다. 차량을 주차장에 두고 마을을 가로질러 단석산으로 향했다. 불과 2킬로 남짓한 마애불상군으로 가는 산행 길은 제법 가파르다.   숨이 날숨들숨하면서 도착한 신선사는 옛 모습을 추측하기가 어렵게 말끔히 단장되어 있다. 본존불 앞에 놓여있는 불전함은 오후의 나른함이 비추고 있어 찾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곳을 지나 나무로 만든 간이 다리를 따라 돌아가면 거대한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 곧추서 있다. 여기가 유신랑이 중악석굴에서 얻은 보검을 시험하고자 내리쳐 잘려진 단석(斷石)이다.   때는 신라 26대 진평대제 시절, 15세에 화랑이 된 유신랑은 17세에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적을 평정할 뜻을 품었다. 혼자 중악석굴(대구광역시 팔공산으로 보는 설과 청도군 오례산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고(告)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4일째 되는 날 갈의(葛衣)를 입은 노인이 나타났다.   이에 유신랑은 여러 차례 노인에게 비법을 전해줄 것을 간청하게 된다. 짐짓 단청을 부리던 노인을 드디어 유신랑에게 비법을 주면서 “그대는 아직 어린데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장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오색의 찬란한 빛으로 사라졌다. 다음해 적병이 점점 침범해오니, 유신랑은 혼자 중악석굴에서 얻은 보검을 들고 인박산(현 백운산)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에서 하듯이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려 보검에 신령스러운 기운을 주었다.   이 보검을 가지고 유신랑은 단석산(月生山이라고도 함)으로 들어가, 칼을 갈면서 삼국을 평정할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하루는 단석산 8부 능선에 있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서서 천관신의 영기를 받은 보검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827미터의 단석산이 숨을 죽이며 가늘게 떨고 있었고, 지상에 있는 뭇 짐승들과 하늘의 날짐승들도 미동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화산 폭발과 같은 포효(咆哮)와 함께 유신랑은 번쩍이는 보검을 바위에 내리찍었다. 순간 태초에 하늘이 열리던 것과 같이 신이한 기운이 하늘로 솟아오르면서 바위가 수직으로 갈라졌다. 이윽고 유신랑은 말을 달려 전쟁터로 나아가 삼한을 통합하고, 우리 역사상 몇 안되는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또한 후일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어 지금도 숭앙을 받고 있다.   유신랑이 보검으로 내리친 단석의 수직벽엔 여래입상이 넷, 반가사유상이 하나, 보살입상이 하나, 인물상이 둘 새겨져 있다. 이 중 인물상을 보면 신라의 관모절풍을 쓰고 긴저고리에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있다. 연구자에 의하면 이 복식과 이차돈 순교비의 복식이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곳에 불상을 새긴 시기가 이차돈이 순교한 후 크게 오래지 않은 때인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대가 되면 이미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아 당풍으로 관복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유신랑이 명산대천으로 유람하면서 삼한 병합의 기운을 받은 때가 신라 26대 진평왕 시절이다. 진평왕이 누구인가? 향가 혜성가의 세 화랑을 금강산으로 유람을 보내기도 하고, 삼랑사(三郞寺)를 준성하여 화랑들에게 그들의 호연지기를 마음껏 펼치게 한 군주였던 것이다.   결국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밑바탕에는 진평왕의 화랑사랑이 큰 몫을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52년간 재위하면서 수많은 전쟁을 겪었지만, 미래를 서라벌 젊은 화랑들에게 있다는 확신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였다고 판단된다.   이곳 단석은 아마도 불교가 서라벌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신성시 되던 곳이었을 것이다. 그 뒤 화랑들의 주요 수련처로써 기능을 수행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유신랑의 전설과 결부되어 오늘날 우리들에게 수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서라벌 곳곳에 산재한 절집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 높은 곳이나 바위암벽이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칠성각’이나 ‘삼성각’이 있다. 칠성이란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 당대 사람들에겐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고, 삼성 역시 ‘환인·환웅·단군’ 등 고조선을 건국한 세 명의 성인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는 데서 판단되듯이 신불습합(神佛習合)의 흔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곳 단석에 새겨진 불상들도 초기 신라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이면서 또한 유신랑이 중악에서 갈의를 입은 노인에게 비법을 전수 받고, 그곳에서 얻은 보검을 갈아 시험을 한 흔적이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서라벌 불교 성지에서 화랑 유신랑은 고도의 수준 높은 수련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런 일련의 수련과정에서 불승의 비법을 배워 무예가 한층 높아졌고, 뒤이어 삼한을 평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단석 사이로 난 바위틈에 가만히 앉아 본다. 서늘한 기운이 아직도 품어져 나오는 것 같다. 시원한 한줄기 바람이 우징곡을 따라 단석을 휘감으며 하늘 높이 사라진다. 서라벌 화랑들의 올곧은 충심이 이곳에서 출발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속 저편에서 피어오르는 경외심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단석산을 내려오는 길은 가을 햇살이 앞길을 인도하고, 부쩍 살찐 다람쥐가 겨우내 먹을 먹거리 준비에 오솔길을 이리저리 가로지른다.   초롱한 눈망울이 더없이 맑아 보인다. 아마 유신랑이 이곳에서 홀로 수련할 때, 몰래 지켜본 다람쥐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두리번거리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pjw322@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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