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따가운 여름날, 담 너머로 고개를 다소곳이 내미고 연붉은 꽃송이로 활짝 핀 모습의 능소화는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다. 조용히 피었다가 시들지 않고 송이째 떨어지는 최후의 모습이 퍽 처량해 보이기도 하다. 연하게 붉은 능소화는 어여쁜 여인이 꽃이 되어 님을 기다리며 담장 밖을 굽어본다는 애절한 전설이 담겨있는 꽃이다.   400년 전 미라와 함께 발견된 죽은 남편을 그리는 한 통의 한 맺힌 주인공의 편지는 다른 부장품이 다 훼손되었는데도 어찌하여 변질되지 않고 그 간절한 사연이 전해지게 되었는지 신비롭기만 하다. 아마 원이 어미가 남편을 그리는 망부석 같은 사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라로 발견된 인물(원이 아버지) 이응태가 서른한 살의 나이로 요절한 해는 1586년 병술년이라 한다.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 하셨지요? 우리 함께 죽어 몸이 썩더라도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드립니다. 당신, 제 꿈에 오셔서 우리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 주세요. 어디에 계신지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지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당신,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을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것인지요… 당신은 한갓 그 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제 마음같이 서럽겠습니까?… 아무도 몰래 오셔서 그렇게 보고 싶은 모습, 꿈에서나 보여주세요.   죽은 남편 이응태는 키도 훤칠하고 기골이 남자다워 외모나 학문에는 뛰어났지만 어느 스님의 예언을 믿고 박복한 앞날을 피하기 위해서는 박색한 아내를 맞이해야한다는 사주에 그의 운명은 바뀌었다. 비록 이응태와 홍여늬 부부는 6년이란 짧은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기구한 운명을 탓하며 이응태는 능소화로 흐드러지게 피는 여름날 다시 못 올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죽은 남편을 떠나보내면서 관속에 고이 끼워둔 영원히 끝나지 않은 사랑의 연속이 오늘날의 우리를 감동시킨다. 박색의 여인이 아닌 예쁘고, 참하고, 교육을 많이 받은 미색의 부인을 맞은 이응태는 사주팔자가 맞지 않아 죽었다고 그 당시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겠는가?   능소화 곱게 피던 날 만나, 능소화 만발한 여름날 두 사람의 서럽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를 통해 잊을 수도 없고, 이기지도 못할 이별의 슬픔은 우리의 가슴에 피처럼 흐른다. 하늘이 정한 운명을 거스르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는 모진 울림은 전해주고 있다.     -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그것은 향락의 거친 꿈도 아니며 정욕의 광기도 아니다. 또한 사랑이란 선이고 명예이며, 평화이고 깨끗한 삶이며 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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