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수 년 간 한국의 산사(山寺)를 그려온 인연은 늘 불광(佛光)의 원류를 찾게 한다. 근년에 다녀온 간다라 불교미술의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의 아잔타 석굴 기행 등이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번 실크로드 여정 중에 만난 낙양의 용문석굴(龍門石窟) 또한 불법(佛法)이 조형화된 현장을 만끽하는 체험이었다. 아니 간절한 기원의 해후요, 어느 전생의 만남이었던것만 같다. 이 같은 설레임은 무리한 시간상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가람을 그리듯 석굴의 전경을 화폭에 옮겨 보고픈 열정으로 가득 찼다.
하남성 낙양시 남쪽(12km)에 위치한 석굴은 이하(伊河)강이 산사이로 흐르고 있다. 이는 마치 산이 궐(闕)모양 같다하여 예전에는 이궐(伊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강을 중심으로 용문산(서산)과 향산(香山)(동산)이 석굴로 조성되었고 물길은 북에서 남쪽으로 흐른다. 현재 두 개의 다리가 강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석굴은 배산임수(背山臨水) 형태로 양쪽에 위치해 있다.
용문석굴연구소(1994년)에 의하면 총2천345개의 석굴(서산 2천43개, 동산 302개)의 굴감이 있는데 그 중 30개가 대형굴이다. 내부의 불상 조성이 10만여구나 되고 석굴조성기 또한 2천800개에 이른다. 흔히 용문석굴의 조성 시기를 3기로 나누는데 1기(태종~고종시기), 2기(측전무후시기), 3기(현동~덕종시기)에 이르는바 서기 500~800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본다.
남북 1km에 걸쳐 흑회색의 매우 강한 석질의 석회암에 조성된 석굴 순례는 실로 숨가쁜 열정을 요구한다. 빈양동(賓陽洞)에서 만불동(万佛洞), 연화동(蓮花洞), 봉선사(奉先寺)로 이어지는 불상의 친견은 어느새 열락의 세계를 맛보는 비천이 되어 허공을 나는듯하다. 그리고 다리 건너 향산의 석굴까지 이르는 여정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찰라와 영겁의 연속이다. 그 긴장과 삼매속에서 화첩이 펼쳐졌고 길손은 붓을 들었다.
하여 부드러운 운강석굴의 석질과는 달리 매우 강한 바위돌에 조성한 수많은 부처상, 보살상, 공양상, 비천상, 나한상. 그리고 아름다운 각가지 문양이 조각되고 새겨진 석굴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느새 숭엄한 경배속에 은혜로 이어졌다.
때마침 즐비하게 강가를 따라 늘어진 수양버들은 폭염을 식혀주고 바위산에 대비되는 운치로 석굴을 품어주고 있다. 그 사이로 흐르는 강물에는 서산(용문산)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황토물빛은 강의 깊이와 서정을 보여주고 부두와 유람선은 낭만을 더해준다. 과거와 현재에 다름 아닌 전생과 현세의 만남인 것이다.
이 장대한 석굴내부의 디테일은 가는 곳마다 개안(開眼)과 감회로써 창작의 본질을 드러내었다. 즉 벽과 기둥에 새겨진 선각과 부조의 만남이 너무도 자연스럽다. 내용에 따른 변화와 기법의 발상이 자유롭고 창의적이다.
빈양동의 거대한 대불(석가모니)은 절대전능한 신(神)의 실체로 다가오는데 거대한 수인(手印)은 마치 한국의 논산 개태사지 석불수인이 연상된다. 이곳 석굴의 중심이자 측천무후의 얼굴로 상기되는 봉선사의 비로자불과 아홉 개상은 치밀한 조각 기법과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로 역사의 숨결을 내뿜고 있다. 그리고 고양동의 갖가지 부조문양과 수많은 비천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길손을 사로잡은 것은 우리의 석굴암이 연상되는 문양과 형상조각, 고부조의 발견이었다. 즉 궁륭천정의 연꽃모양과 포즈만 다를 뿐 정병을 든 관음보살의 자태와 의상의 친연성이 느껴지는 보살상(만불동). 석굴암 본존불처럼 불상과 독립된 연꽃무늬 광배불감. 그리고 석굴을 지키는 인왕상과 역사상의 느낌이었다.
한편 아쉬운 일정으로 도판으로 확인되는 이곳 향산의 간경사(看經寺) 10대 제자상은 바로 석굴암을 떠올리게 하니 이를 어쩌랴. 이 경이와 감동은 세월의 강물이 흘러오듯 새삼 불법의 길을 인도한 수많은 인연들에 대한 합장으로 이어졌다. 그 만남의 환희속에 귀국한 후 한 달여 만에 마침내 ‘용문석굴 전경’을 그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