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이 슬피 울었다는 ‘범우리’(범울이) 정구지 ‘키토산부추’로 연간 20억원     호명(虎鳴)은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어진 범이 슬피 울었다고 하여 ‘범우리’, ‘범어리’ 또는 ‘호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승삼(僧三)마을(경주시 용강동)에는 승려로 변한 세 마리의 범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자주 해치곤 하였다. 두려움에 떨던 주민들은 합심하여 범을 몰아내기로 했다.   어느 날 일제히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 범을 쫓았다. 도망가던 범이 호명에 이르렀으나 형산강으로 산이 끊어지고 더 이상 도망갈 때가 없자 슬피 울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고려 현종 때 경주 부윤으로 있던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승삼에 여승으로 변한 호랑이 3마리가 사람을 해친다는 소문을 듣고 범을 잡으려고 하자, 범이 도망가다가 지금의 호명 앞산에 이르니 산이 끊어져 갈 곳이 없으므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호명이 위치한 곳이 형산강이 돌아가는 지점으로 더 이상 산이 이어지지 않는데서 생겨난 설화로 어쨌든 호명은 범의 울음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본래 안강현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강동면 호명리로 되었다. 호명은 경주에서 7번 국도로 포항으로 가다가 모서에 이어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다.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안강 갑산리와 안강리, 양동마을과도 맞닿아있다.     풍차가 걸린 네덜란드모텔이 있는 도로 서편일대가 호명리 새각단에 해당한다. 도로 동편인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호명이다. 경주시청을 기준으로 13km 거리에 있으나 승용차로 15분정도가 소요된다. 호미자루 쳐 넣을 돌 하나 없는 들판 월성이씨(40가구), 광주안씨(30가구), 달성서씨(8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형산강을 끼고 있는 이 마을은 넓은 들판과 풍부한 물이 있어 일찍이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옛날부터 ‘일사방이호명’이라고 했을 정도다. 지금도 강동에서 제일 부자마을로 알려진 호명은 벼농사와 정구지(부추)로 높은 소득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키토산부추’라는 이름으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정구지는 30가구가 10만여 평에서 연간 20억원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강동면 전체 정구지 생산량의 약 40%가 이 마을에서 난다. 이곳 땅은 돌이 섞이지 않은 사질토로 들에서 일하다가 호미자루라도 빠지면 그 자루를 쳐 넣을 돌 하나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토질이 정구지 생산에는 최적지이기 때문에 질 좋은 정구지를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회재도 이르지 못한 3불급의 호계공     새각단 호명의 서북쪽에 새로 세워진 마을이다. 도로 서편에 있는 모텔, 주유소 등 7~8가구가 들어서 있다. 북산서사(北山書社) 경주인 호계(虎溪) 이을교(李乙奎)를 향사하는 곳으로, 경내에는 지경사(持敬사)와 포요당(抱搖堂)이 있다. 이 서사는 본래 조선 순조 30년(1830)에 경주 북군동에 북산사(北山祠)로 창건되었데, 고종 5년(1868)에 금령에 의하여 헐린 것을, 1967년에 호명리 101번지 호계정사가 있던 자리에 복원하였다. 이을규는 28세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와 교리, 경산현령과 초계군수 등을 역임하고, 중종 34년(1539)과 36년(1541) 두 차례에 걸쳐 사절로 중국을 다녀왔다.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회재 이언적을 따라 학문을 강론하다가 명종 원년(1546)에 39세로 생을 마감했다.   호계공과 관련해 회재가 이르지 못한 3가지인 3불급이 전해오고 있다. 회재가 이르지 못한 장원과 중국사절, 자식번창이 그것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회재에 비견할 만큼 뛰어난 것을 풍자한 이야기로 생각된다.   호계서당(虎溪書堂)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가 강론하던 곳으로 본래 호롱골에 있었는데, 6.25전쟁 때 소실되어 1955년에 동향 5칸짜리 접집을 그 자리에 다시 세웠으나 1974년에 그 옆에 남향으로 새로 지으면서 3칸으로 줄였다고 한다.   조한보의 본관은 창녕(昌寧)으로, 단종 때 절의신인 충정공(忠貞公) 조상치(曺尙治)의 손자이다. 성종 때 성균관 진사를 지냈고, 당대 석학인 회재 이언적과 무극태극(蕪極太極)을 논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경지정(敬止亭) 조선 고종 때 안교현(安敎鉉 경주안부자)이 그의 선조를 추모하고,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885년 사자봉 기슭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누마루를 갖춘 이 정자는 동편 2칸과 가운데 1칸은 청마루를 배치하고 그 나머지는 방을 배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둥근기둥에 팔작지붕을 얻은 이 정자에는 기문을 비롯한 각종 시판들이 빼곡하게 걸려있다. 호명분교에서 도랑을 건너 맞은편에 있다.   호명리정효각(虎鳴里旌孝閣) 달성인(澾城人) 서상빈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36년에 세운 정효각이다. 효자 서상빈(徐尙賓)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3년 상을 치루었는데 어른들과 다름없이 행사하였다. 또 그는 30년간 홀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이 들자 두 번이나 단지수혈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20리 길을 걸어 성묘하였다고 한다. 7번 국도를 타고 포항방면으로 가다가 동편 길가에서 이 정효각을 볼 수 있다. 호명리 238-1에 있다.       마을입구에 ‘호명동천(虎鳴洞天)’ 표석     모아초등학교 호명분교 이 마을에 있던 호명분교의 터로, 1994년 3월 모아초등학교에 통합되었다. 현재 폐교로 비어있다. 마을표석 마을 어귀 오른쪽 사자산 기슭에는 ‘호명동천(虎鳴洞天)’이라는 표석이 자연석 표면을 깎아 고른 후 음각으로 새긴 표시석이 있다. 7번 국도가 새로 나기 전에는 본래 이 산 기슭으로 도로가 있었으며 이곳이 마을 입구에 해당한다고 한다. 놋방골 호명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큰 바위가 있다.   모과곡(募過谷) 호명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모과골이라고도 한다. 범웃골 호명의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현재 기도원이 들어선 골짜기 범굴이 있다. 사자봉(獅子峰) 호명의 남쪽에 있는 산. 마을 어귀의 남쪽 즉 네덜란드모텔 동쪽에 솟아 있는 산이다. 절골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하는 골짜기로, 호명 동남쪽에 있다. 범골 밑에 현재 기도원이 들어서 있는 자리다. 호롱골 호명리에서 오금리로 넘어가는 동쪽 골짜기로 회룡곡(回龍谷), 회룡동(回龍洞)이라고도 한다.넙덕바우 복호산 8부 능선에 있는 큰 바위군이다.       국도 7호선 밑으로 난 마을진입 확장해야     호명은 산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으며 입구는 비록 초라해 보이지만 막상 마을을 들어서면 꽤 넓고 큰 마을이다. 강동면에서는 단일마을로는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한다.   국도 밑으로 나 있는 마을진입로가 좁고, 낮아 큰 차는 물론 소방차의 마을진입까지도 어려움이 있다. 진입로 확대가 시급한 실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최근 형산강의 제방을 높여 도로보다 제방이 2m 가량 높아 홍수가 날 경우 강물이 마을로 역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따라서 도로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7번 국도를 높여 마을로 역류되는 강물도 차단하고, 도로 밑으로 나 있는 굴다리형식의 마을진입로도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총 167가구에 남자 200명, 여자 230명으로 총 430명이 생활하고 있다. 어느 시골마을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이 마을도 100여명이 65살 이상 노인이라고 한다. 또 57살 이하는 7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올해 95살의 이낙희(계산댁) 할머니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이규호(79 예비역 육군 준장), 안병열(70 전 안동대 인문대학장), 이광영(68 아주대 명예교수), 안홍원(67 예비역 육군 중령), 이홍우(31 공학박사 포스코연구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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