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낙양에 도착하였고,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많은 불교유적과 유물들을 둘러본 터여서 별로 기대할 것도 없으련만 나는 왠지 소림사를 가볼 수 있다는 마음에 부풀어 있었다.
어린 시절에 즐겨 읽었던 무협소설에는 화산파, 무당파, 곤륜파니 하면서 소림파도 항상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림사를 배경으로 한 무술영화인 ‘소림사 18동인’ ‘소림사 10대 제자’에 매료되었던 나로서는 나름대로의 소림사를 마음속으로 그려왔었다. 버스가 소림사에 가까워지면서 중국 5대 명산의 하나인 숭산(嵩山)의 모습이 웅장하면서도 수려한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소림사의 입구 소림사에 당도하기 4㎞전부터 난립한 무술학교에는 수만은 무술지망생이 훈련을 하고 있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왜 무예의 수련에 매달리는가? 문득 우리나라에서도 학교보다는 오히려 학원이 더 번창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 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소림사의 정문 주차장에 도착하여 눈앞에 펼쳐진 소림사는 더 이상 심산유곡에서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스님들이 수행의 일환으로 무예를 단련하는 곳이 아니었다. 이미 TV와 인터넷을 통해 소림사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자본주의의 정신이 스며들었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었다.
소림사의 정문에서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하는 까까머리 수련스님들을 보며 상념에 사로잡혔다. 소림사도 속세의 이데올로기인 이윤창출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단 말인가? 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하면서 7개의 기업을 거느리고 있단다. 그런 돈으로 중생들을 구제하겠단 말인가?
본래 소림사는 중국의 5대산 중의 하나인 숭산(嵩山)을 배경으로 한 수행의 도량이요. 선행을 장려하고 악을 배척하는 정의의 본산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나는 소림을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무공을 기르기 위한 특별한 시설이 갖춰진 무예의 수련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를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소림정신이다.
그 중에서도 소림정신은 무림의 다른 문파와는 다르게 불교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그 정신세계는 깊고도 심오하였으리라. 특히 인도에서 온 <발타선사>의 정신을 받들어 북위의 효문제가 창건하였으니 동양철학의 원류인 인도의 정신도 스며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런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한 소림무술은 무언가 다를 것이란 나의 생각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 되었단 말인가? 아님 내가 너무 피상적으로 소림사를 이해하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 일행은 일정에 쫓겨 반청복명(反淸復明)운동에 동참하다 청군에 의해 잿더미로 변한 것을 후세에 다시 중건한 가람은 가보지 않고 소림사의 역사와 함께 한 스님들의 부도탑을 둘러보기 위해 20인승 전기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차창이 없었기에 달리는 속도에 의한 바람으로 후덥지근한 날씨에 짧게나마 상쾌함을 선사해 주었다.
이런 전기자동차는 이미 몇 일전에 ‘평요고성’에서 타 보았지만 관광객의 편의와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우리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불국사의 코앞까지 각종 자동차들을 들이대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부도탑을 둘러본 후 되돌아오기 위해 차를 기다리면서 나의 이름을 두문자로 하여 지어주는 ‘趙君中原行, 國開兩岸通 來玆佛門願 福佑事可成’이라는 한자시가 무림에 나아가 너의 꿈을 펼쳐보라며 재촉을 한다.
이번 소림사의 여행은 잠깐이었지만 ‘온고이지신’을 새겨볼 수 있는 기회와 아울러 전통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현실적응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 보람찬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